[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16) C회장의 장례식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16) C회장의 장례식

H철강 C회장의 장례식은 가족장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십구재가 한참 지난 뒤였다. C회장의 장녀는 나의 절친한 벗이다. 그녀는 내게조차 부친의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상을 치른 뒤에도 그녀와 몇 번의 통화와 두 차례의 만남이 있었건만…. 섭섭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르는 게 돌아가신 분의 뜻'이었다고.

C회장의 가족은 직계 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렀다. 가족은 장례식장에서 사흘 동안 아버지, 형, 동생, 남편이었을 고인을 추억했다. 그날 그들은 이 세상에 '소풍 왔다' 갔을 C회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필요한 것은 C회장의 영정 사진, 상조회사에서 보낸 국화꽃 두 바구니, 술 80여병뿐이었다. 세상에서 고인을 가장 아낀 사람들의 회고와 추억, 몇몇 쓰라린 과거가 더해졌다.

장례식은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C회장과 생의 마지막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과정이었다. 사흘에 걸쳐 가족들은 C회장과 이별식을 치렀다. 그렇게 '남편'을, '아버지'를, '형'을, '동생'을 보냈다. 못해 준 게 많아서 슬펐고, 고인이 남은 사람들의 삶에 남겨 준 게 많아서 슬펐다.

죽음은 늘 두렵다. 세상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 두렵다. 종교인에게 죽음은 시작이겠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세상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한꺼번에 이별을 한다는 것은, 끔찍하다. 죽은 자는 영혼을 버려야 하고, 세상에 남은 자들은 그와의 인연을 버려야 한다.

장례식은 영원한 이별을 인정하는 예식이다. 이별을 하려니 슬프고, 고인의 고되고 팍팍하던 생전의 삶이 떠올라 다시 고통스럽다. 비어 있는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술로도, 눈물로도, 그리움으로도.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16) C회장의 장례식

죽은 자 앞에서 산 자는 늘 죄인이다. '성산포 시인' 이생진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죽음은 그랬다. 느닷없었다. 빨리 죽어서 안타까웠고, 오랫동안 기다려서 고통스러웠다. 그가 재벌였든지 성직자였든지, 세상 권세를 누리던 그 누구였든지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나에게 장례식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품었을 한, 슬픔, 기쁨, 인연을 정리하는 미팅 장소다. 맺힌 것은 풀고, 부족한 게 많은 자신에게는 용서를 비는 자리다. 우린 이걸 소통이라 배웠다. 그곳은 망자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모여서 이승에서의 관계를 정리하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화려하든 소박하든 중요하지 않다.

시골 장례식장에서 죽음은 이생진의 그것처럼 '한'을 푸는 넋두리 같다. '가난한 사람을 보리밭에 묻어 마음껏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기를 바라는' 살아있는 자의 '바람'이 넘친다. 현실보다 그가 갔을 '저세상이 아름답다'고 살아 있는 자들 스스로가 달랜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배부른 '은수저'로 태어날 것이라고 위로한다.

C회장은 가족과 이별했다. 가족으로서, 연인으로서, 우리의 아버지로서, 어머니의 아들로서, 동네 형으로서 마지막 커뮤니케이션 시간을 보냈다. 그가 떠난 자리를 지우고 닦아내고, 다른 일로 대체하는 시간에 사흘이 필요했다. 살면서 경사는 몰라도 애사는 가야 한다고 배웠다. 슬픔을 나누면 무게가 가벼워지기에….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