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20>달인 메커니즘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lt;20&gt;달인 메커니즘

“자, 10초 후 들어갑니다. 준비하세요. 10, 9, 8, 7… 큐!”

큐 사인이 들어가기 전, 머릿속은 백짓장이다. 이 순간을 위해 연습한 대사가 하나도 생각나질 않는다. 카메라 탤리라이트(카메라 윗부분에 달린 빨간 신호등)에 불이 들어 왔는데도 눈의 초점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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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실이 아니다. 홈쇼핑 첫 방송을 준비하기 이전에 꾼 악몽이다. 이 끔찍한 꿈이 현실로 될까 봐 외우고 또 외웠다. 100% 애드리브(즉흥 대사) 방송이 원칙이지만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는 대본을 쓰고, 입에 붙도록 외우고 외웠다.

미국에서 처음 홈쇼핑을 접했을 때 방송에 나온 쇼 호스트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노련한 방송 진행을 보며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폼 나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쇼 호스트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그들이 진행하는 방송을 유심히 보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정도쯤이야, 나는 일주일만 배우면 금방 할 수 있어. 말하는 게 뭐가 어려워? 딱 나랑 맞는 직업이군.'

첫 방송 후 피디는 몸에 힘을 빼라고 주문했다. 일주일이면 끝낼 거란 호언장담은 악담이 돼 데뷔 일주일 만에 방송을 끝낼 뻔했다. 눈으로는 카메라 동선을 익혀야 했고, 입으로는 소비자를 설득해야 했다. 귀는 이어폰으로 피디의 지시 사항을 들어야 했다. 손은 분주했으며, 실연(實演) 속도가 카메라 눈보다 빨라서는 안 됐다. 다음 동작을 위한 모니터를 확인하는 것도 진행상 중요한 포인트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쇼 호스트 후배는 말했다. 감 잡는데 2년이 걸렸다고.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건 성수대교 사건 이후였다. 성수대교 아래로 추락해 물에 빠진 차에서 헤엄쳐 살아 나온 아주머니 생존자가 떠올랐다. 그날로 수영 교습 티켓을 끊었다. 수영 코치는 말했다. 꾸준히 배우면 반드시 물개가 된다고. 6개월이 지나도 수영 실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장애였다. 수영 코치는 내가 물에 빠질까 봐 몸에 힘을 줘서 물에 뜨지 않는다고 했다.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울 때 아버지가 몸에 힘을 빼라며 짜증내던 기억이 선명하다. 문제는 힘을 빼는 것이라고. 그들은 몰랐다. 힘을 빼서 잘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면 힘이 빠진다는 사실을.

'달인' 프로그램을 보면 답이 나온다. 남대문시장의 한 음식점에서 배달하는 아주머니 머리 위에 열 겹으로 밥상 쟁반이 얹어진다. 그녀는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배달한다. 신문배달원이 새벽에 집집마다 신문을 돌리면서 정확한 위치에 신문을 던져 넣는다. 수출 선박 안으로 자동차를 하나하나 실으면서 수백, 수천대의 자동차를 마치 줄자로 그어놓은 것처럼 정확한 장소에다 신속하게 빼곡히 주차한다. 노력과 시간의 곱이 그들을 달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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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빼라고 해서 빠지는 게 아니다. 근육과 세포는 반복된 시간과 연습으로 몸에 최적화된다. 이후 완벽하게 적응 단계로 이끈다. 연습, 노력, 반복을 해야만 도달하는 '달인 메커니즘'이다.

방송을 진행하면서 알았다, 호호백발 할머니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물이 무서워 몸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는 생각도 착각이다. 공포가 연습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이겨낼 정도의 연습이 부족한 것이었다. 연습은 경험이다. 떨어지는 연습, 긴장하는 연습, 두려움을 마주하는 연습이 곧 경험이고 노하우가 된다. 연습이 반복되면 미세한 근육조차 뇌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힘을 빼라고 주문하지 않아도 몸은 안다, 힘이 빠질 때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달인은 몸 커뮤니케이션이 축적된 사람이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