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22>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나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lt;22&gt;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나

K이사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K는 굴지의 연예 매니지먼트 A사의 개국 공신이다. 스타 꿈나무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K는 회사 대표와 호형호제했다. 어렵고 힘들 때 잡은 손, 결코 놓지 않겠노라고 맹세도 했다. 그런 그가 회사를 나왔다.

능력 있고 똑똑한 인재가 들어오면서부터 설 자리가 없어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능력자의 주장에 맥없이 밀려났다. 회사 대표는 K의 손을 잡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K의 얼굴이 핼쑥했다. 나이 쉰을 목전에 두고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하는 서글픔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의 입에서 유명 가수 이름이 마치 동생, 조카, 자식 부르듯 새어 나왔다. 한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생들과 부대끼며 한솥밥을 먹던 일을 회상했다. 방송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추운 날 하염없이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일도 추억했다. 힘들어도 행복하던 날이었다. K는 몇 주 후 낯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의 어린 꿈나무를 길러 보자는 사람들과 함께.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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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임금 문공은 19년 동안 방랑 생활을 했다. 그 곁을 유일하게 지킨 사람은 개자추 한 명뿐이었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기 직전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내 목숨을 잇게 해 준' 사람도 개자추다. 문공이 나라를 찾은 후 논공행상을 할 때 개자추는 등용하지 않았다. 그를 까마득히 잊은 것이었다.

실망한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금전산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논공행상에서 개자추가 빠진 것을 안 문공이 개자추를 찾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산에 불을 지르면 스스로 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개자추는 독했다. 나무 한 그루를 부둥켜안고 그대로 타 죽었다. 한식날에 하루 동안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는 것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함이다.

'개자추 콤플렉스'란 말도 나왔다. 피해자 코스프레다. 상대방에게 동정을 얻고 응석을 부리는 심리, 당한 만큼 미안하게 만드는 심보가 그것이다. 개자추가 보면 또 산속으로 들어갈 만한 왜곡이다.

돌아보면 별일도 아닌 것을. “왜 나를 뺐느냐?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냐?”는 한마디만 했어도 될 텐데. 사람을 시켜 산속을 찾았을 때도 '너무 너무 서운했다'고 말했으면 될 것을. 죽음을 택할 정도로 그렇게 뼈에 사무칠 일이었는가.

허벅지 살을 떼어 먹인 개자추의 희생은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깜박한 것과 다르다. 사지에서 함께 살면서 힘이 돼 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돌아선 건 응석이 아니라 슬픔이다.

누군가 내게 은혜와 복수의 차이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복수는 잊지 못하는 것,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결코'라는 부사는 은혜에 붙을 수도 복수에 붙을 수도 있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는 당사자 몫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모멸감이나 상처에 집착한다. 복수는 상대방이 '이만큼 했으면 됐다'를 깨닫게 될 때까지 멈춰선 안 된다고 여긴다. 반면에 은혜에 대한 감정은 너그럽다.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판단하고 보은의 깊이와 시간을 정한다. 복수는 멈출 수 있지만 은혜는 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 문공이 잘못했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