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1>“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전 장관은 “요즘 모두 사색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는데 앞으로 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면서 “사색으로 AI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이어령 전 장관은 “요즘 모두 사색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는데 앞으로 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면서 “사색으로 AI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추석 연휴 지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현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전화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 시대의 지성(知性)인 이어령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인터뷰를 약속했지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뒤로 밀리곤 했다.

이 전 장관은 시대를 직관하는 통찰력으로 새시대의 패러다임을 우리 앞에 제시한 창조 아이콘이다.

그의 서재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안에 있었다. 영인(寧仁)문학관은 이어령 전 장관과 부인 강인숙 교수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명칭이다.

산자락인 데다 주택가여서 공기는 맑았으며, 차량 왕래가 적어 조용했다. 서재는 마치 한옥 대청마루처럼 넓고 아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북한산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전 장관의 활동 폭은 넓다. 언론인, 교수, 문학평론가, 장관, 시인, 소설가, 기호학자로 활동했다. 특히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엔진 역할을 했다. 이 전 장관은 2006년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 통합을 역설했고, 이후 '생명자본주의' 운동을 주창했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오후 서재에서 2시간 넘게 이뤄졌다. 이 전 장관은 동서고금의 인문학과 첨단 기술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명불허전이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1>“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어떤 호칭이 편한가.

▲선생님이 가장 편한 호칭이다. 가까운 사람은 다 선생님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교수님” 하면 교수는 직업 명칭인데 그게 뭐냐고 해서 학계나 제자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누가 “장관님” 하고 부르면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아, 참 장관으로 일했지'라고 생각한다. 사회성이 강한 관계나 기업인, 언론인들은 장관이라고 부른다. 학계나 지식인 계층은 '교수님' '박사님'으로 부른다. 문인들도 선생님이라고 한다. 나를 부르는 걸 보면 어디 있는 사람인 줄 다 안다.(웃음)

-창조 아이콘으로 불린다.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이다. 언젠가 모 기자가 많은 호칭 가운데 직업 명칭을 하나로 바꾼다면 뭐라고 하면 영광이겠느냐고 묻기에 '크리에이터', 즉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최고로 명예로운 호칭이다.

-창조란 무엇인가.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집에 창조성 강한 아이가 있으면 편안하지 않다. “밥상을 이렇게 놓자” “젓가락을 다른 걸로 사용하자” “어머니 신발은 이걸로 신자”고 한다. 그냥 하던 방식으로 살면 편하다. 그러나 창조력과 생명력이 고갈하면 죽는다. 창조 없는 사회는 겨울이 왔는데 여름옷을 입고 사는 것과 같다. (이 전 장관은 탁상 위에 놓인 손가락 길이 만한 몽당연필을 집어들었다.) 이 연필은 독일산인데 특이하게 만들었다. 쥐면 손가락이 구멍에 들어간다. 연필 하나도 창조 산물이다. 그래서 창조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재 안에서 작은 레고 인형을 들고 나왔다.) 이건 인형 USB다. 인형 아랫도리를 잡아당기면 USB가 나타난다. 손을 들어올리면 끼워진다. 레고는 창조성이 가장 강한 기업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는 박사들이 레고 집짓기, 레고 블록을 한다. 창조성은 인간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창조 민족'이다. 같은 한자를 보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자 귀퉁이를 떼어 내고 음을 모방해 가타카나를 만들었다. 창조에는 기쁨이 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1>“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을 만든 배경은.

▲조선일보 정보화 조찬 모임에서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시대에선 모두가 똑같다. 오히려 우리가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조선일보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주제를 내걸고 신년호에 '산업화에 지각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과거에 학교를 지각하면 교실 밖에서 벌을 받았다. 그처럼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각생으로 근대화 문 밖 생활을 했다. 산업화가 늦어 일제 식민지가 된 뼈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고 '어떤 선진국보다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영국 산업혁명,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날 때 동양에서는 그런 혁명이 없었다. 있다면 역성(易姓)혁명이었다. 한국은 시민혁명이나 산업혁명, 사회혁신 같은 근대화로 홍역을 치를 때 무대만 빌려 준 근대화 지각생이었다.

-정보화 캠페인은 어떻게 했는가.

▲1997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함께 전국민정보화 캠페인을 벌었다. 부총리를 지낸 오명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찾아갔다. 신문사끼리 담 쌓고 지내지 말고 정보화운동을 함께 하고, 사설도 함께 쓰자고 했다. 정보화에 관심이 많던 방상훈 당시 조선일보 사장과 오명 동아일보 사장이 합의, 두 신문이 정보화 캠페인을 벌였다. 언론 사상 처음 두 신문이 같은 사설과 내용을 지면에 동시에 실었다. 그때 전국 학교에 컴퓨터보내기 운동도 벌였다. 이 캠페인을 계기로 정부는 정보기술(IT) 발전에 전력을 기울였고, 한국이 IT강국·인터넷강국으로 급성장하는 시발점이 됐다. 인터넷에 문화가 뒷받침하면서 한류 열풍으로 발전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은 외국에서도 부러워했다. 일본 교토대 오구라기조 교수가 2005년 일본 학술 잡지인 대항해에 쓴 '인터넷의 빛과 어둠'이라는 글에서 한국이 인터넷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이어령 교수의 슬로건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썼다. 그 글에서 일본이 산업화는 잘했지만 정보화는 한국이 월등히 잘해서 앞으로 정보화에 일본이 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이사장은 서재에서 그런 글이 실린 일본 책을 들고 와 내용을 설명했다. 중요 대목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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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어떤 혁명인가.

▲산업혁명은 동력과 기계혁명이라고 하는데 실은 동력혁명이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 2차는 내연기관과 석유, 3차는 전기 혁명이다. 안경은 눈을 확장시킨 도구니까 기계 혁신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돌 던지기나 마찬가지다. 에너지 혁명은 신기술이 아닌 완력, 단백질로 된 근력을 확장시킨 것이다. 인간은 제 몸무게밖에 못 든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에 가보면 골리앗 크레인은 배를 들어올린다. 몸의 도구가 산업혁명이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을 주요 국정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두뇌와 연결해야 한다. 생각 혁명을 해야 한다. 그동안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분 있었다. 전문 분야에서 컴퓨터가 그 일을 했다.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했다. 대형 컴퓨터는 군사용으로 사용했다. 발전 과정을 보면 먼저 군에서 인공위성 발사 등에 컴퓨터를 이용했다. 초기 컴퓨터를 발전시킨 것은 군이었다. 이걸 기업에서 물자 만드는데 사용,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만들고, 군에서 발전시키고, 그걸 기업이 사용해 이른바 학(學)·군(軍)·산(産) 복합체제로 발전했다.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됐다. 이걸 기업들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이다. 지금까지 IT를 군과 기업에서 이용했다. 그 IT를 금융과 연결해서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팔았다. 그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다. 이제 산업 사회와 부국강병 패러다임은 끝났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한다.

-정보화 시대 이후는.

▲정보화 다음은 생명자본주의시대다. IT는 생명과 결합해야 한다. 개인 행복과 생명을 자본으로 하는 시대다. 나는 2006년 '디지로그'에서 생명자본을 설파한 바 있다. AI 왓슨은 음식을 요리하거나 암 발견 및 치료, 퀴즈 문제를 푼다. 인간은 복지와 행복에 관심을 기울인다. 산업화 시대에는 생명과 관련된 것은 모두 낙후됐다. 생명이나 의료, 복지, 오락, 봉사, 인문학은 산업 사회에서 뒤로 밀렸다. 만약 알츠하이머에 걸린 환자가 내 아버지나 내 아들이었다면 돈을 다른 데 쓰겠는가.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111>“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생명이 자본임을 설파한 건 언제인가.

▲새천년위원장 시절 즈믄둥이(2000년 1월 1일 처음 태어난 아기) 출생을 전 세계로 중계했다. 한국은 정보화에 앞섰고, 광케이블이 잘 깔렸다. 그러나 어디서 아이가 태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0.1초 차이로 '응애'하고 세상에 나올 텐데. 세계 1위인 IT를 이용해 경기도 안산시 모 병원에서 2000년 새해 태어난 첫 아기를 전 세계에 중계했다. 생명이 자본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어린이가 태어난 것은 생명 가치다.

-청년들에게 할 말씀은.

▲요즘은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숙제는 물론 심지어 친구와 밥 먹은 곳도 검색해서 찾는다. 검색하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한다. 사색으로 AI 시대에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