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2>발톱 밑 가시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2>발톱 밑 가시

케이블 방송사 전직 아나운서였던 후배 L씨가 행사 사회를 맡았다. 그녀가 쓰는 말은 듣기 거북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행사에 참석했던 초등학생 학생에게 “~하셔서” “~하셨어요?” 라는 극존칭을 썼다. '닭을' '흙이'의 표준어 발음은 '달글'과 '흘기'다. 아나운서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다. 그런데도 '다글 먹다가' '흐기 들어가서' 라고 선명하게 발음했다.

L은 행사가 끝난 후 식사모임에서 “여러분들 건배합시다”하며 건배 제의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핀잔을 줬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여러분이지. 아나운서였다면서 기본을 틀리면 어떡해.” 하마터면 “너 아나운서였던 거 맞긴 하니?” 빈정댈 뻔했다.

그녀는 당황했다. “아, 맞아요. 여러분들이 아니라 여러분이죠. 습관이 됐네요. 민간인이 된지 한참 돼서…” 민망했을 텐데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그녀를 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지난 밤 신문, 방송에 나온 내용이 화제가 됐다. 어떤 내용인지 잘 몰라 내가 무슨 얘기냐고 옆 친구에게 물었다. L이 큰소리로 말했다. “선배, 작가가 책만 읽지 말고 세상 일에도 관심 좀 가지세요. 글 쓰는 사람이 신문, 뉴스도 안 보고 어떻게 글을 써요?” 그녀는 반 년 전 내게 당했던 무안을 설욕했다.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2>발톱 밑 가시

발가락이 아팠다. 통증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새 신발 때문인가 싶어서 다른 신으로 바꿔 신었다.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돋보기로 들여다보았다. 발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가시는 날카로운 통증으로 내 일상을 마비시켰다. 뽑아낸 가시가 너무 작아 허탈했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가시가 있던 자리는 여전히 시큰거렸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믿는다는 사람이 왜 저래?”라는 지적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아나운서' '작가' '믿는 사람' 이란 수식어 때문에 자격지심이 몇 배다. 별 뜻 없이 하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찔려서 그렇다.

친구의 발톱 밑 가시는 전 남편이 부부싸움 도중에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는 이혼이라는 더 큰 상처를 감수하고 작은 가시를 빼냈다. 전 남편이 한 말은 “너 같이 뚱뚱한 여자랑 사는 내 기분을 알아?”

어려서부터 한 번도 날씬한 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남편은 결혼 전에도 날씬하지 않은 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남편이 그녀에게 던진 말은 부부 간에 해서는 안 될 금기어였다. 동시에 아내의 존재 근간을 무너뜨리는 비수였다.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2>발톱 밑 가시

이를 악물고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노력할수록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발톱 밑 가시는 건드릴수록 살 속을 파고들었다.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비참함'이란 신경을 건드리고 '고통'이란 염증을 만들었다. 남편과 헤어지고서야 통증은 사라졌다.

발은 하루 종일 체중을 지탱하며 온갖 수고를 견딘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고단함을 신발 속에, 양말 속에 감추며 버텨야 하는 우리 인생과 비슷한 처지다. 가시는 그래서 더 아프다. 작은 날카로움에 상처가 깊고 치유는 더디다.

무심코 던진 말로도 일상은 마비된다. 분(忿)의 중심이 사람인지 문제인지 가려야 상대방이 덜 아프다. 문제가 아닌 인신공격이 되었을 때 삶은 고통이 된다. 비위에 거슬려 기분이 언짢아지면 옳고 그름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상대 정체성이 타깃(target)이 되면 둘 사이에 남는 건 악감정뿐이다. 상처 입은 자존심, 작아서 보이지 않는 발톱 밑 가시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