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엔지니어, 당신이 슈퍼 히어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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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바티칸 교황청이 발간하는 신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지난 2009년에 20세기 여성 해방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세탁기라는 기사를 실었다. 194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는 17㎏ 분량의 빨래 세탁에 4시간이 소요됐지만 전기세탁기 도입 이후 40분으로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세탁기 외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꼽으라면 대개 나침반, 시계, 전화, 비행기, 전기, 컴퓨터, 바퀴 등을 떠올린다. 이러한 발명품 없이 현대 문명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인류 문명을 크게 발전시킨 발명품을 만든 사람을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엔지니어'는 '엔진을 만드는 사람'에서 유래했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엔진은 '동력을 만드는 기계 장치'로 인식됐지만 그 이전에는 '기발한 기계 장치'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엔지니어는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킨 주역이다.

지금 인류는 유례없이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이전에 없던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기후변화, 미세먼지, 환경오염, 사이버테러, 새로운 질병과 각종 재해 재난 사고가 그것이다. 하나같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다.

그렇다고 기술 문명 이전 시대로 회귀할 수도 없다. 전기도 세탁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량 소비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의 방식도 성찰해야 하지만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합리 타당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영화 속에서라면 슈퍼 히어로들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지만 그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문제를 풀어 줄 현실 속 히어로는 엔지니어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원과 수송 수단,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저장하는 기술, 사이버테러를 막을 수 있는 보안 시스템, 재해·재난을 사전에 인지하고 예방하는 시스템, 원전 사고와 같이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고 현장을 수습할 수 있는 로봇, 더 안전하고 저렴한 생체 진단기와 의약품, 교통 사고를 막아 주는 자율주행자동차와 교통 통제 시스템 등 엔지니어가 풀어야 할 과제가 산재했다.

이런 과제는 한두명의 탁월한 엔지니어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과 엔지니어의 협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한 예로 반도체는 모든 기기의 지능화에 필수 요소다.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등을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는 5만7000여명이 일하고 있다. 대부분 엔지니어다.

이들과 협력하고 있는 전 세계 부품, 장비 공급업체에서도 엔지니어가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를 활용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장비와 시스템을 개발·적용하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엔지니어가 필요할 것이다.

엔지니어가 너무 많아서, 한 개인의 기여도가 낮아서 주목받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의 노력이 있어서 세상은 조금씩 진보한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이 사소하게 느껴지곤 한다. 큰 시스템의 일부만을 연구하다 보면 자신이 기계의 작은 부속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작은 성취에 크게 도취될 수도 있다. 엔지니어가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이유다. 자신이 속한 팀, 회사, 국가를 넘어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해 보길 바란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아동기금(UNICEF)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세계 70억명의 인구 가운데 21억명은 여전히 오염된 물을 마시고, 45억명은 깨끗한 화장실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전기 세탁기가 발명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50억명의 인구는 여전히 손빨래를 해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엔지니어가 '슈퍼 히어로'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okwon@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