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반도체 코리아' 위기 아닌가

[데스크라인]'반도체 코리아' 위기 아닌가

“팡(FAANG)이 터지니 반도체 업체 실적도 '빵' 터졌다.”

요즘 종종 듣는 이야기다. FAANG은 페이스북(F), 아마존(A), 애플(A), 넷플릭스(N), 구글(G) 등 미국 대표 기술 기업 이름 앞 글자만 따와서 부르는 별칭이다. FAANG이 주목 받는 이유는 올 1분기 실적 때문이다. 모두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놀라운 실적은 스마트폰 침체 영향으로 세계 ICT 시장을 짓누르던 암운까지 걷어냈다. 미국 증시는 무역전쟁, 금리인상 등 여러 악재에도 오히려 반등했다. FAANG이 데이터센터 서버를 크게 늘린 덕분에 스마트폰 침체에도 반도체 슈퍼호황은 지속됐다.

FAANG 기업 면면은 흥미롭다. 주력 비즈니스 모델은 제각각 다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온라인 쇼핑, 클라우드 서비스, 동영상 스트리밍, 검색 등이다. 그런데 DNA가 비슷하다. 모두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갖춘 비즈니스로 대결한다. 겉모습은 온라인 서비스 기업이지만 본질은 장치 산업에 가깝다. 매년 수십조원을 데이터센터 구축에 쏟아 붓는다.

막강한 데이터센터 인프라는 거대한 시장 진입 장벽이 됐다. 당장 이들 기업을 따라잡으려면 수십조원대 인프라와 데이터 구축 자금이 필요하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이 '구글 종속'에서 탈피하려고 시도했지만 불발에 그친 이유다. 구글이 검색 시장 90% 이상을 점유한 프랑스에서는 아예 정부가 구글에 맞설 검색 포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미래 산업도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가진 이들 손아귀에 있다.

대항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삼총사다. 이들도 머리글자를 따서 'BAT'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미국 증시에서 위상이 FAANG과 맞먹는다. 유럽 선진국도 아닌 중국에서 대항마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중국 정부의 치밀한 산업 육성 전략 덕분이다. 중국 정부는 데이터센터 기반 온라인 서비스 시장은 한 번 뺏기면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자국 기업이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FAANG 중국 진출을 막았다. 그 사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 BAT를 키웠다. 그리고 경쟁력을 갖추자 FAANG과 '맞짱' 뜰 수 있게 밀어 줬다.

중국 정부 칼끝은 이젠 '반도체 코리아'를 향하고 있다. 무려 250조원을 반도체 산업 육성에 투입키로 했다. 그 결실이 이르면 올해 말 메모리 시장 진입으로 나온다. 전자신문이 입수한 중국 대응전략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계획대로 올해 말 메모리를 양산할 경우 2022년부터 한국 메모리 기업 연 매출 가운데 8조원 이상이 사라지게 된다.

중국이 무서운 이유는 한 번 성공해 본 전략을 우직하게 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뚜렷한 대응 전략이 안 보인다. '반도체 굴기'라는 중국 정부의 선명한 전략과 대비된다. 중국이 쫓아오면 멀리 도망간다는 '기술 초격차 전략' 총론 정도만 되뇐다. 한편에서는 정부가 반도체 핵심 기술이 담긴 직업환경측정보고서를 공개하려는 일까지 벌어진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했다. 우리는 상대의 전략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지만 똑 부러지는 대응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메모리 슈퍼호황에 취해서 자만하는 것인지 무감각해진 것인지 도무지 긴장감이 없다. 안 돼도 1년 이상 뒤처져 있다던 미국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와 영업이익률이 거의 같아졌다. 반도체 코리아 위기는 이미 우리 내부에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장지영 성장산업부 데스크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