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인 미디어]고통은 인간을 발전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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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인 미디어]고통은 인간을 발전시키는가

사람을 발전시키는 기제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고통'이라고 답한다. 오직 고통을 겪은 자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영화 속 주인공(제임스 매커보이) 지론이다. 23개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 인물인 주인공은 고통을 겪지 못한 자는 불결하다고 폄하한다.

소녀를 납치해 고통을 가하면서 자신의 숨겨진 24번째 인격 '야수(비스트)'를 깨우려는 주인공을 보면, 고통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나쁜 예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제임스 메커보이가 열연한 23 아이덴티티는 미국 영화 감독 윌리엄 빌리 밀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빌리 밀리건은 원래 자신의 인격을 포함해 총 24개 다른 자아가 몸 안에 있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였다. 강간과 강도 등 악질 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신질환자라는 이유 때문에 무죄를 받았다.

23 아이덴티티 주인공과 빌리 밀리건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빌리 밀리건은 부모 이혼과 재혼 양아버지의 자살을 겪으며 처음으로 자신말고 다른 자아를 분열시켰다. 9살 무렵부터 새 양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24개 인격으로 나뉘게 된다.

분명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로부터 폭행 등 학대를 받아온 23 아이덴티티 주인공과 닮았다.

두 인물처럼 다중인격,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대부분 강한 스트레스나 고통스러운 경험에 의해 시작된다. 외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자아를 생성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방어 기제다. 특히, 유년기 때 겪은 외상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성적 학대나 신체적 학대, 가족의 죽음 등 외상 경험이 고통을 야기한다는 의미다.

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과 분리하면서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발생한다. 대부분 불안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만, 영화 속 주인공이나 빌리 밀리건처럼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외부로 돌리는 인격이 탄생하기도 한다. 빌리 밀리건의 24개 인격 가운데 13개 인격이 범죄를 저질렀던 것처럼 '야수(비스트)'가 나타날 수 있다. 어린 시절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고통은 인간을 발전시킬 수 있지만, 나쁜 쪽으로 퇴화시키기도 한다. 영화 속 주인공과 빌리 밀리건은 사회적 악이었고, 이는 인간이 지향해야할 도덕·규범적 가치에서의 후퇴다. 영화 원제인 '분열(Split)'은 단순히 인격의 분열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와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