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SW를 만드는 사람과 워라밸

[미래포럼]SW를 만드는 사람과 워라밸

일(워크)과 삶(라이프)의 균형(밸런스)을 뜻하는 '워라밸'은 이번 문재인 정부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직장 생활 대부분을 고도 성장기에 보낸 50~60대에게 아직은 조금 어색한 개념이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에 야근은 일상이었고, 토요일도 정규 근무일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수출만이 살길이요, 핵심 경쟁력은 근면한 국민성이라고 배웠다. 헌법에서 정한 '근로' 의무는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소명감으로 살아 왔다. 그때는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희생'과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SW를 만드는 후배의 삶이 떠오른다. 그리 많지 않은 급여에 야근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지금도 SW를 만들고 있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재라고 불리는 그들. 과거의 희생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SW를 만드는 후배 절반 이상이 수주형 SW 개발 사업에 참여한다. 사업은 계획된 후 진행 과정에서 고객 이해도가 높아지고 요구 사항은 명확해지는 특성을 띤다. 불분명한 욕구를 명확한 기능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발 생산물 가변성은 수주형 SW 개발 사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정보화 시대 초기에 이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추가 변경된 고객 요구가 타당하면 언제나 설계를 변경해 줬고, 이미 개발된 기능도 수정해서 다시 만들었다. 업무량은 계획된 것보다 훨씬 많아졌다. 당연히 예산과 납기 조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특히 정부와 계약할 때 사업 중간 계약 금액 변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이해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유엔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하는 전자정부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가 됐다.

SW 개발 계약 목적물 가변성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개발 기간과 비용 변동성은 우리의 '저녁이 없는 삶'으로 희석됐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SW 중요성을, SW 개발자 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두 한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 SW를 만드는 후배에게 “너희가 하는 일은 당연히 야근이 많은 일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이상 SW 가변성과 예산, 납기 고정성 속에서 SW를 만드는 사람들의 '저녁'이 완충 역할을 하도록 둘 수는 없다.

지난해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취임하자 마자 SW 산업 생태계가 '아직도 왜?'라는 화두로 '공공SW사업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개정안에는 수주형 SW 개발 사업에서 장시간 근로를 유발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제도가 잘 마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업 내용 변경에도 계약 조건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 계약 내용은 무효로 한다는 공정계약 원칙, 상세한 요구 사항 공개 및 심의 절차 도입, 과업심의위원회 설치 의무화 및 이를 통한 과업 범위 관리 명확화와 이에 따르는 계약 조건 및 비용 조정 근거 등이 담겨 있다. 적정 사업 기간을 보장하기 위해 사업 예산을 이월할 수 있다는 점도 명문화했다. 더 이상 SW를 만드는 사람들이 '희생'을 강요당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SW를 만들어 갈 우리 후배를 위해 한 가지를 건의한다. SW 사업 예산 편성 및 집행에서도 SW 개발 계약 목적물 가변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정보화 예산 배정 방식은 사업에 고정 예산을 배분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계약이 진행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예산 구조에서 사업비 변동을 유발하는 과업 변경 승인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2년 후에 사용할 SW를 미리 확정하는 예산제도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계속 유지돼야 하는가.

국가재정법에는 예비비, 총액계상 제도 등 SW 사업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가 이미 마련돼 있다. SW 개발 사업이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SW가 4차 산업혁명 시대 엔진이라면 외부 변화에 능동 변경이 가능하고, 창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반영할 수 있는 가변성이라는 특성이 존중돼야 하며, 예산 변동성도 인정돼야 한다. SW를 만드는 사람도 '워라밸'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면 특히 더 그렇다.

박환수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상무 hspark@sw.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