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자율주행차와 국제표준

[ET단상] 자율주행차와 국제표준

1886년에 '말'을 대신해서 자동차를 처음 만든 사람은 독일의 카를 벤츠다. 미국 포드는 1896년, 일본 도쿄자동차제작소는 1900년대에 각각 설립됐다. 한국 자동차 역사 출발점을 1962년으로 보면 평균 약 60년 늦은 셈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차지하는 한국 위상은 높아졌다. 그러나 변혁 앞에 새 시대가 오고 있다. 이번에 대체될 대상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자율주행 시대를 맞기 위한 선진국의 노력은 한층 구체화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 개발, 도로 인프라 정비, 자율차용 정밀지도 구축, 사회 공감대 형성, 소비자 교육 등 광범위하다. 특히 표준 관련 이슈는 과거와 다른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먼저 자율주행차 관련 표준 범위가 정보기술(IT) 산업 전반으로 연계되고 있다. 그동안 자동차 관련 표준은 차량 내부시스템과 부품 관련 표준화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자율주행기술이 AI 기반 인지 기술을 비롯해 도로 인프라, 통신, 사이버 보안, 인간공학 등 IT 전반으로 연계되면서 자율주행차 표준 영역도 더 이상 차량 제조사만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한 예로 5세대(5G) 이동통신 표준은 IT 산업 표준이면서 차량·사물통신(V2X) 핵심 표준으로 자리 잡기 위해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이버 보안은 인터넷 문제뿐만 아니라 자동차 안전 관련 핵심 이슈로, 국제 표준화기구인 ISO와 미국자동차공학회 협력 아래 표준(ISO/SAE 21434)을 제정하고 있다. 이 밖에 정밀지도의 경우에도 과거 내비게이션 정보 제공 범위를 넘어 도로상의 모든 정보를 자동차와 공유하기 위한 동태 데이터 표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둘째 국제표준은 기업 간, 국가 간 산업 주도권 확보의 전략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아직 인류가 경험치 못한 산업으로서 안전문제, 정태·동태 지도 활용, 사이버 보안, V2X 등 대부분 영역이 신산업이다. 이에 따라서 산업화 후 발생 가능한 문제를 예측하기 어렵고, 이런 상황에서 표준화 작업은 미래 산업 프레임을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 되고 있다. 국가 인프라 구축 전략이 표준 제안 활동에 반영되고, 기업의 미래 이윤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최근 일본이 ISO TC22 SC31회의에서 워킹그룹(WG) 신설을 주도하며 차량용 실시간 클라우드 서비스 표준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셋째 가이드 같은 역할을 하던 표준이 청구서를 내민다. ISO 등 국제표준은 태생이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기술의 배타성 이윤 추구를 막고, 산업 활성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다르다. 특히 미래 전개도를 그리는 자율주행차 표준화는 경제성 이슈에 더욱 민감할 수 있다. 표준 이면에 특허, 관련 장비, 소재, 노하우 등 다양한 산업 간 이해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지능형교통체계(ITS) 분야 가운데 동태 위치 참조 표준으로 특허 기반 라이선스가 내재된 ISO 17572-3과 같은 표준은 앞으로도 나올 수 있다. 선생님처럼 가이드를 제공할 것 같던 표준이 뒤에서 청구서를 내밀고, 이는 후발 주자에게 많은 비용을 치러야 넘을 수 있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동차 산업을 수성하고, 자율주행차 시대에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자율주행차 표준화 관련 인식 제고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표준 전문가 확보다. 표준 전문가는 연구 역량은 물론 언어, 협상력 등 종합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양성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정부가 장기 안목으로 표준화 지원 사업에 대한 예산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둘째 원활한 표준화 작업을 위해 연구개발(R&D)과 연계가 필요하다. 국제표준 제안을 위한 관련 기술이 R&D 과정에서 축적되기 때문이다. 현재도 정부 과제 공고 시 일정 부분 표준 연계 과제를 지정하고 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기술은 표준 제안의 기반이며, 거꾸로 표준을 적극 반영해서 개발한 기술이 특허로 이어진다면 경제성 가치는 더욱 커진다. 기술과 표준의 선순환 관계에 주목해 표준화 활동에 탄력을 줘야 한다.

자율주행차는 4차 산업혁명 대표 주자다. 특허출원 수는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한국이 4위라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자율주행차 표준화 역량은 더 차이가 벌어져 있다. 이들 3개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 표준화 역량의 벽을 허물어야 진전이 있을 것이다.

최종찬 국가기술표준원 자율주행자동차 표준코디네이터 choijc@k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