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기업가 정신과 규제 샌드박스의 올바른 방향

박진성 래피드세븐코리아 지사장
박진성 래피드세븐코리아 지사장

시장을 선도하는 혁신 기업가를 뜻하는 '안트러프러너'라는 말이 유행한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이들을 지칭한다. 세상에 없던 신기술과 신산업으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성공시키며 미래 유니콘 기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사업가 또는 그러한 기업을 뜻한다. 이 낱말이 나올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덧붙는 주장이 있다. 각종 규제 때문에 국내에서 창업하기 어렵고 중국 등 다른 경쟁국에 미래 산업 주도권을 뺏기고 있어 이를 풀어 줄 '규제 샌드박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규제'란 규칙, 법령, 관습 따위로 일정한 한도를 정해 그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연관어로 규칙, 명령, 법률 등을 규정대로 따르거나 좇아서 지킨다는 '준수'라는 낱말이 있다. 규제 샌드박스란 어린이가 모래를 갖고 노는 놀이터처럼 새로운 제품·서비스를 출시할 때 법·제도에 얽매이지 않도록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시켜 주는 제도다. 2016년 영국에서 핀테크 산업을 육성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4차 산업혁명과 경제 활성화라는 대명제에 따라 규제 연관 검색어 순위가 '준수'에서 '해제'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지난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 '규제 프리존 지정·운영에 관한 특별법'(가칭)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정치권과 산업계 공방을 거쳐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 입법화를 완료, 규제 샌드박스 4법이라 불리는 제도 가운데 정보통신융합법과 산업융합촉진법이 올해 1월부터 시행됐다. 규제자유특구법과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이 4월 시행을 앞뒀다. 이 가운데 규제자유특구법은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목적을 고려한다. 비수도권 14개 지방자치단체에 한해 2개씩(세종은 1개) 선정한 특화 산업에 대해 관련 규제가 사라지거나 허용 기준이 확대되며, 재정·세제·금융·인력 등 혜택을 제공한다.

한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규제자유특구법처럼 지역·사업 수에 제한을 두는 것과 별도로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사업 검토·지정을 위한 신기술·서비스 심의위원회를 2월과 3월 두 차례 열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초국적기업과 거대자본을 보유한 선진 산업 국가에 맞서 신흥경제개발국가가 자국 산업을 오롯이 지켜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체제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전환하는 우루과이 라운드에 저항해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숱한 농민들이 목숨을 내놓고 쟁의를 일으킨 사례가 벌써 20~30년 전 일이다. 최근 카카오 카풀 서비스와 한국 택시 업계 갈등 이전에 미국 우버 서비스의 국내 진출로 벌어진 분쟁이 이미 5년여 전이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2017년 망 중립성 원칙 폐기를 결정한 가운데 국내에서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페이스북, 구글, 넷플릭스에 망 사용료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선진국 거대 금융·투기 자본이 자국 규제를 피해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동유럽 등으로 생산공장을 옮긴 포스트 포디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현지 중앙정부와 지역 정부에 불법 뇌물 공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규제를 무력화시킨 후 노동 착취와 환경·생태 파괴를 저질렀다. 각국 산업계와 시민사회는 국익을 지키고 이러한 일방통행을 저지 또는 지연시키기 위해 여러 제도를 만들어서 맞서야 했다. 규제란 다름 아닌 자국 산업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권과 시민 안전, 환경, 생태를 지키는 보호막인 셈이었다.

지난 시기에 경제특구 또는 자유무역지대 이름으로 이들을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재벌과 대기업 생산공장이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빠져나가면서 양극화가 심화됐다.

시대는 과거 형식을 앞선다. 규제보다는 자율, 수구보다는 모험 및 도전이 미래를 앞당길 수 있다. 카풀 사업자와 택시 노동자, 농업 보호와 도시노동자 가계비용 대립에서 알 수 있듯이 무분별한 규제 변화는 양극화 심화와 이익집단 간 사회 갈등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큰 의미로 합쳐져 있지만 개별 산업마다 반드시 풀어야 할 규제가 서로 다르다. 이 때문에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지자체별 규제 프리존을 만들면 불법 노동 착취와 환경·생태 파괴가 가능하던 지난날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다. 망 분리를 제도화해 놓고 다시 망연계 솔루션을 찾아야 하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당국과 산업계에서 기업가 정신 못지않게 시민 정신을 함께 견지하기 바란다.

박진성 래피드7 지사장 jason_park@rapid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