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났습니다]김명준 ETRI 원장 "창의연구 활성화해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 새도약"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을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부임 초기에 인사차 만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오래 된 지인을 만나는 듯 편안했다. 이것저것 가리는 것 없이 사람을 참 편하게 대해주는 스타일이다. 30년 넘게 일해 온 곳에서 마지막 봉사를 한다는 기분으로 원장직을 맡은 것이 이런 여유를 주는 듯 했다.

그는 이미 은퇴 후 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연구원 동기를 비롯해 내년께 정년을 마치는 지인들과 함께 연구원에서 멀지 않은 충남 금산 지역으로 귀촌한다는 계획이다. 마을 이름도 지었다. 흰색과 보라색 식물만 심자며 '흰보라팜'이라고 했다가 북촌 문학 모임인 '북촌시사(北村詩社)'를 본 따 '흰보라시사'라고 했다. 입촌 자격도 만들었다. 자신이 읽은 책 1000권 또는 음반 1000장을 가지고 와야 한다. 아니면 직접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김 원장은 책 1000권을 들였다.

이곳에서는 다문화가정을 이룬 외국인 주부를 위해 '한마음 교육 봉사단'을 운영할 예정이다. 자녀 초등 교육이 가능하도록 중학 검정고시 시험을 볼 수 있는 수준까지 교육한다는 목표다. 대학시절 몸 담았던 야학 경험을 살렸다. 그는 “원장직을 맡지 않았더라면 내년부터 실행하려 했던 계획인데 잠시 미루게 됐다”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직원들을 독려할 계획입니다. 하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는 과제를 만들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에서 통하는 과제를 제안해 국제화 하자'는 것입니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김 원장은 프랑스에서 위탁 연구를 하던 시절에 배운 지식을 ETRI에도 접목할 계획이다.

“프랑스 지도교수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해준 얘기가 있습니다. '틀려도 좋으니 남의 생각 말고 너의 생각을 꺼내라'는 것입니다. 선진국 연구원들은 몸에 배인 습관이 됐지만 우리나라 학생이나 연구원들에게는 아직 부족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연구개발(R&D) 성과를 낼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김 원장은 이런 창의 원천연구를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 그는 선진국 연구소나 기업이 정해놓은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생각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전에 없던 영광을 손에 쥘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데스크가 만났습니다]김명준 ETRI 원장 "창의연구 활성화해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 새도약"

지난 5월 취임 후 곧바로 씨앗을 뿌렸다. 연구조직을 80개 연구실로 개편, 창의 원천연구에 몰두하도록 했다. 각 연구실은 25명 규모로 운영한다. 향후 10년 이내에 이 가운데 10개 연구실은 세계 최고 수준 연구집단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다.

김 원장은 “지난 2011년 7개 창의연구센터를 만들어 지원하는 실험을 해 봤는데, 당시 2개가 세계적인 연구집단이 됐다”면서 “80개 연구실에 연간 40억~50억원 규모 R&R 예산을 몇 년 동안만 지속 지원하면 10년 후 글로벌 톱 수준의 성과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자신했다.

그는 이어 “과거에 우리는 산업기술을 개발해 기술을 국산화하고 산업을 진흥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역량이 쌓이면서 국제 규격과 스펙에 맞출 수 있게 됐고, 2000년대 이후에는 시스템을 통합하는 단계까지 올랐다”면서 “앞으로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증명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창의연구에 총력을 기울여 ETRI를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 카드를 꺼내 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 원장은 이를 위해 '창의도전연구활성화(Creation of a Concept)'를 위한 창의 원천연구 비중을 현재 15% 수준에서 50%까지 늘리고 기관 설립 목적과 밀접한 산업화 교량 역할은 30%, 중소기업 지원 역할은 20%선을 유지할 생각이다.

[데스크가 만났습니다]김명준 ETRI 원장 "창의연구 활성화해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 새도약"

다음은 일문일답.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으로의 변신을 여러번 천명해왔다. 그러면서 인공지능(AI)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AI 연구소와 지능화융합연구소도 신설했다. 이렇게 AI에 집중하는 이유가 뭔가.

▲AI는 더 이상 SW 과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경제와 사회 전반에 필요한 기본 패러다임이 됐다. 인터넷 혁명, 모바일 혁명이 과거 사회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것처럼, 향후 10년은 AI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지난달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라고 말했다. 세간에서 4차 산업혁명 핵심으로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을 거론하는데, 그 중에서도 첫 번째가 AI라고 생각한다.

-ETRI 내부에 SW 분야인 AI 연구를 강화하면 상대적으로 하드웨어(HW) 연구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내부에서 불편해 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 설문조사 시 본부장과 그룹장급은 70%, 비보직 연구원은 50%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AI 개념을 '알파고'에만 한정해 너무 좁은 의미로 생각한 때문이었다. 내 업무와 관계 없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서비스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확장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AI는 알파고에 컴퓨팅과 네트워크를 포함한 광의의 개념이다. 그동안 ETRI에서 추진해 온 IDX와 유사한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모든 것은 AI와 따로 떨어뜨려 볼 수 없다. SW 영역에서 HW를 배척할 수 없고, 반대로 HW도 SW를 등한시 할 수 없는 연구 구조가 이뤄졌다. 원장이 SW 전문가라고 조직을 편협하게 운영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HW를 중시하고 여기에 SW가 더욱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창의원천연구 비중 확대 외에 어떤 변화를 원하는가.

▲융합연구과제 수를 해마다 늘리고, 중소기업지원과제도 지속 증액해 나갈 계획이다. 반면 소형연구과제는 관심을 갖고 대폭 줄이겠다. 연구원 정원은 소폭 줄일 계획이다. 연구생산성 제고에도 신경써 연구소기업을 포함한 창업기업 수를 매년 늘려나가도록 하겠다. 연간 30명 수준인 연구 인력 현장파견도 40명 이상으로 확대하고, 창업을 전제로 신규인력을 선발하는 등 젊은 연구원 창업을 장려하고자 한다.

-재원마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듯하다. 예산은 어떻게 확보할 계획인가.

▲ETRI가 낸 성과 가운데 DMB는 연간 예산이 150억원 규모인 대형 과제였다. 당시에는 이런 과제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제당 10억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기술사업화 성과로 출연연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 비중을 낮추고 안정적인 출연금을 늘리는 작업이 시급하다. ETRI는 전체 연구비의 70% 이상을 연구원들이 PBS로 따온다. 하지만 PBS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다. 다만 이 과제도 자꾸 파편화해서 나눠주기식으로 운영할 것이 아니라 연간 30억~50억원 규모로 늘려야 한다. 그러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번에 신설한 연구실은 대부분 25명 규모로 운영한다. 이들 연구실에 30억~50억원 규모 과제를 9년만 지속해도 세계적인 연구실로 진입할 수 있다. 이달 중에 역할과 책임(R&R)을 재정립하고 수입구조 포트폴리오 작업을 해나갈 예정이다. 5억원 미만 소형 과제는 점차 없애겠다.

[데스크가 만났습니다]김명준 ETRI 원장 "창의연구 활성화해 '국가지능화 종합연구기관' 새도약"

◇김명준 ETRI 원장은?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 74학번이다. 성격이 활달해 과대표를 맡았다가 학도호국단 간부까지 지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구로공단 공원을 가르치는 야학에도 참여하며 사회를 보는 눈을 키웠다.

그가 컴퓨터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컴퓨터에 푹 빠진 그는 프로그래밍과 SW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아래한글 및 V3백신과 함께 3대 국산 SW로 인정받는 바다 DBMS다. 바다 DBMS는 이후 다수 기업에서 사업화했다. 알티베이스와 리얼타임테크 등이 대표적이다.

석·박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프랑스 낭시 제1대학에서 받았다. 졸업 후에는 프랑스 국립 LORIA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선진 연구환경을 경험했다.

ETRI와의 인연은 1986년부터 시작됐다. SW 연구에 더욱 몰입하고 싶었던 그는 SERI, KIST, ETRI 등 주요 연구소 가운데 당시 국산 컴퓨터 개발이 한창이던 ETRI를 택했다. 이후 그는 30년 넘게 SW분야에서 입지를 다졌다. 데이터베이스연구실장, SW연구부장, 기획본부장, SW콘텐츠연구부문 소장, 창의연구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2012년에는 제27대 한국정보과학회장도 맡았다.

이듬해에는 미국 리눅스재단 이사가 되면서 세계 공개SW 산업과 커뮤니티 운영 및 경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6년부터는 국가SW정책연구소장을 지내다 올해 ETRI 원장에 선임됐다.

대담=김순기 전국총괄 부국장

정리=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