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집행위원회의 한국산 VCR 반덤핑조사방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대책을 들고나오지 못했던 가전3사가 뒤늦게나마 제소당사자인 필립스사 제품을 덤핑조사키로 하는등 맞불작전을 펴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가전3사는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한국산 VCR 반덤핑 제소와 관련, 국내에서 시판되고 있는 필립스사 제품에 대한 덤핑여부를 집중조사, 그동안 수수방관 해온 EU의 한국산 VCR 반덤핑조사문제에 본격 대응키로 했다.
가전3사는 이를 위해 각사별로 통상팀을 가동, 관세청 등 정부기관을 통해 필립스사의 대한수출 전자제품의 종류와 판매량.가격 등에 대한 자료수집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전3사의 이번 대응조치는 어딘지 모르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다분히 형식에 치우친 강수를 띄워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겉만 빙빙돌았던 가전 3사의 갑작스런 공동전선구축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업체의 공동대응이 얼마나 절실하느냐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 열쇠 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회의 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가전3사는 반덤핑 혐의가 드러날 경우 현지생산을 확대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EU의 반덤핑문제 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게 사실이다.
이번 EU집행위의 조사로 고율의 덤핑판정을 받을 경우 아무리 현지생산을 늘린다해도 한국산 VCR의 대EU수출길이 막혀 당장 타격이 예상될 뿐아니라 국산제품의 대외이미지도 상당히 손상돼 결국 한국산 전자제품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결코 안이하게 대처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같은 필립스사제품의 덤핑조사만으로 EU집행위가 쳐놓은 "한국산VCR 반덤핑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이번 조사로 덤핑혐의가 드러날 경우 이를 제소를 취하시키는 무기로 이용할 수 있으나 선진국들이 공급하는 제품의 현지가격이 일반적으로 자국내 가격보다 높다는 점을 감안할때 실효 를 거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덤핑혐의가 인정된다해도 산업피해구제신청절차를 밟아 필립스 제품에 철퇴를 가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려 효용가치가 떨어질뿐 아니라 필립 스가 국내공급하는 컬러TV,오디오, VCR 등 전자제품은 통틀어 가전3사가 EU에 수출하는 VCR의 7분의 1수준에 불과한 2천만달러규모에 불과해 잘못 대응하다간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사실 필립스가 한국산VCR를 반덤핑혐의로 제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산 VCR는 이미 EU의 반덤핑덫에 걸려 올 2월말까지 5년간 반덤핑 규제 로 가격인상의 불이익을 받는등 대가를 톡톡히 치른 바 있다. EU반덤핑법령 의 자동소멸조항에 의거, 5년만에 수입규제에서 풀려난 한국산 VCR에 필립스 는 또다시 멍에를 씌우려 하고 있다. 수입규제해제 7개월만에 같은 혐의를 씌워 그것도 VCR헤드까지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우리를 너무 얕잡아봤다는증거다. 얼마나 우리의 대응력이 미흡했으면 같은 사안으로 두번씩이나 당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차적으로는 안하무인격인 필립스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사태가 이지경에 이른 데는 국내업체들과 정부도 책임을 공유해야한다. 1차 공세때 그만큼 당하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정부와 업계가 공동으로 다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해도 한계가 있는 판에 주도면밀한 전략없이 대외방어막을 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덤핑조사도 대응책중에서는 적극적인 강공수단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다각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먼저 현지사정을 적확히 파악해야 한다. 과연 한국산VCR의 EU현지가격이 국내가보다 월등히 낮아 고율의 반덤핑마진을 맞을 만한 소지가 있는지, 만약 그럴 가능성이 높다면 필립스와 EU집행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알아내야만 거기에 맞는 처방전을 마련할 수 있다.
만의 하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한국산 VCR의 덤핑이 확실시되면 우선덤핑마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업계와 정부의 대EU로비와 막후교섭도 훌륭한 대책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협상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통상전문가를 길러야 한다.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그에 대한 처방전없이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경우도 상정해볼 수 있다. 수순을 제대로 밟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