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1)

1979년 3월 세계은행(IBRD)은 한국 정부의 보증하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2천9백만불의 차관을 제공키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세계 은행 이사회에서 일부 이사국이 후진국에 첨단기술 개발용 차관을 제공하려 는데 대해 이의를 제공했다.

"후진국에는 도로나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건설하라고 개발자금을 빌려 주는 것이지 선진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반도체나 컴퓨터산업을 개발하라고 돈을 빌려 줄 수야 없는 것 아닌가" 그러자 맥나마라 총재가 그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개발도상국에도 종류가 여러가지 있다. 개발도상국이라 해서 다같은 것은아니다. 따라서 그들 나라의 특성에 맞게끔 개발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대신 우수한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다.

이러한나라는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우리가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한국을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 삼아 자금 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맥나마라 총재의 권위있는 발언으로 차관 제공 문제는 쉽사리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어떠한 연구소였으며, 왜 그 많은 차관이 필요했을까? 1970년대에도 최첨단기술로서 지극히 어려운 기술로만 인식된 반도체와 컴퓨터기술의 개발을 전담할 연구소로서 전자기술연구소가 설립된 것은 1976년 12월이었다. 당시로서는 모험이라 할 이 연구소는 상공부 산하의 재단법인으로서 KIST내부의 반도체기술개발센터와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의 연구원을 모태 로 하여 출범했다.

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은 과학기술처가 아닌 상공부에서 주도했지만, 그 싹은 이미 1970년대초에 KIST 내부에서 트고 있었다. KIST에서 본격적인 반도체기술 개발에 착수한 사람은 김만진박사였다. 미국 GE에서 오랫동안 반도 체개발업무에 종사하다 귀국한 그는, 1973년 KIST 반도체장치연구실장으로 8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고 10여평의 연구실에서 TV용 반도체의 개발에 나섰다.

연구개발비의부족에 허덕적이던 그들 개발팀은 이듬해 미국의 반도체회사인 페어차일드에서 헌 개발장비를 기증받고 100여평의 실험실을 확보하여 개발 기구를 반도체기술개발센터로 발전시켰다. 헌 장비에다 규모도 작은 공장이 었으나 반도체 생산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클린룸(clean room)도 갖춘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설이었다.

이처럼 KIST가 반도체 개발에 착수하게 된 배경을 당시의 소장 한상준은이렇게 설명했다.

"1970년대초 KIST 내부에서 앞으로 어떤 기술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개발할 것이냐고 논의한 결과 반도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왜 그러한 결론이 나왔느냐 하면, 1960년대 후반부터 그때까지 미국이나 일본에서 반도체는 "산업 의 쌀"이라 해서 선전을 많이 했습니다. 쌀이 식료품의 중심이듯이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라 해서 아우성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관심을 갖고 지켜 봤는데 반도체산업은 기술집약적인 산업인 동시에 자본집약적인 산업이었어요.

설비투자가 엄청나게 소요되었죠. 자원은 부족하지만 노동력이 풍부한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는 사업이었죠.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 몇몇 기업들이 반도체사업에 투자는 하고 있었지만 미.일에 비해 기술 수준이 너무 빈약했어요. 그래서 반도체 개발만큼은 개인기업에 맡길 일이 아니라, 연구소가 앞장서서 할 일이다 해서 KIST에서 개발하기로 했던 거죠" KIST 반도체기술개발센터는 반도체를 생산하는 시설과 장비가 갖춰져 있고기능공이 투입된 일종의 생산공장이었다. 이 센터는 몇가지 반도체제품을 시험생산할 뿐만 아니라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사명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소인 KIST가 반도체 생산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공장운영은 대기업에 맡기고 KIST의 반도체기술 개발센터는 독립된 연구기관으로 발족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다시 한상준 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KIST에서 반도체공장을 갖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다. 이것이야말로산업계가 할 일이다. 대기업이 자기자금으로 하고 KIST는 기술지원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강력히 대두됐어요. 또 그것이 정부의 기술개발정책 방향과도 부합된 것이었죠. 그래서 KIST 자체에서 반도체기술개발센터를 민간에 넘기자는 안을 정부에 건의했어요. 그런데 반도체기술개발센터를 KIST안에 둘 게아니라 별도로 독립시켜 전자기술연구소로 발족시키자는 의견이 KIST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도 나왔어요. 그때 마침 정부는 구미전자공업단지 건너편에 새로운 공단을 조성하고 반도체와 컴퓨터공장을 유치해서 한국의 실리콘 밸 리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곳에 전자기술연구소가들어가야 주변에 입주할 민간 반도체공장을 도와줄 수 있어 안성맞춤이라는 거였죠. 멋있는 실리콘 밸리를 만들자면 연구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전자기술연구소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그보다 몇년 전에 구상되었다. 73년 11월 박대통령은 80년대초에 수출 1백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로 집약되는 상위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때 중화학공업개발을 기술적인 면에서 뒷받침할 수있도록 선박.기계.석유화학.전자.해양 등 5대 전략사업의 기술연구소를 아울 러설립할 계획도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은 구미공단이 조성되고 구미공단 건너편에 실리콘 밸리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청와대 제2경제수석 오원철과 상공부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 당시 국책연구소의 설립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상공부는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전자공업육성계획을 수립하여 1976년 9월 경제장관간담회에 상정했는데, 그 안에 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그후 연구소 설립계획은 급속도로 추진되어 그해 12월17일에 대통령 재가를 얻어 12월30일에 설립등기를 완료함으로써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탄생했던 것이다. 초대 소장에는 서울공대 교수와 전자공학회장을 역임한 바있는 오현위가 임명되었다.

연구소가 설립되고 나자 연구소를 세울 부지는 마련되어 있으나 공장을 짓 고반도체를 생산할 시설 및 장비를 구입할 자금이 없었다. 특히 반도체 생산 용시설 및 장비를 구입하자면 막대한 외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연구소의 설립과 동시에 한국 정부는 세계은행에 2천만달러의 차관을 신청했다. 그러자1977년 8월 이집트인 이스칸더(Magdi Iskander)를 책임자로 하는 세계은행의 평가조사단이 내한하여 후진국에서의 반도체 및 컴퓨터 개발을 위한 연구소 설립사업에 대한 타당성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세계은행의 철저한 타당성 검토로 차관 교섭이 지연되고 있는 동안 오현위 소장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 KIST 소장 한상준이 전자기술연구소장을 겸임했다. 1977년 11월 2대 소장에 취임한 한상준은 그동안 취약했던 컴퓨터개발분야를 이용태를 중심으로 보강한 다음 소장밑에 세명의 부소장을 두었다.

그리하여설계개발담당부소장에 김만진, 전산개발담당부소장에 이용태를 임명함으로써 반도체 개발은 김만진, 컴퓨터 개발은 이용태에게 책임을 맡겼다. 세계은행이 전자기술연구소에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하는데는 2년 가까운세월이 필요했다. 세계은행은 단순히 차관을 제공하기만 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그 무렵 후진국이나 개도국은 대여받은 차관 자금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라 추진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못한 예가 많았다. 때문에 세계은행은 차관 대상국이 계획한 프로그램을 철저히 관리했는데, 모든 사업계획을 검토 함은 물론 공장을 짓고 자재를 구입하는 일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따라서 차관 신청국이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면 신청 금액을 삭감하고 추가하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 별도의 컨설턴트를 채용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전자기술연구소의 사업계획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2년에 걸친 검토 끝에 세계은행은 전자기술연구소를 한국의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로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세계은행의 평가조사단 책임자인 이스칸더 박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은행의 의도는 전자기술연구소를 단순히 기술 개발을 하는 연구소가 아니고 상당한 규모의 연구소를 지어 반도체를 개발에서부터 양산까지 하는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한국 기업이 거기에 가서 노하우를 배우고 사람을양성해서 궁극적으로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일어나도록 하자는 것이었어요.

또반도체를생산하자면 산소.질소.수소 등 순수한 가스가 필요한데, 그러한 가스를 만들어 구미공단내의 다른 반도체공장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죠. 한마디로 한국 반도체산업의 발판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죠. 컴퓨터분야에서도 조그만 생산시설을 만들어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PC를 들여다놓고 한국 기업이 와서 보기도 하고 거기서 직접 생산도 하되 생산 수량이 늘어나면 기업이 직접 공장을 지어 생산하도록 하자는 계획도 들어 있었죠.

한국을선진화시키는데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이용태의 이야기였다.

이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이집트인 맥디 이스칸더가 상사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무척 애를 썼다. IBRD의 고위직은 기금을 많이 부담하는 선진국 사람들이므로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예는 드물었다. 그런데 개도국 출신인 평가조사단 멤버들이 같은 개도국인 한국에 반도체.컴퓨터산업을 심어주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은행 평가조사단은 왜 개도국인 한국에 첨단기술인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러한 이용태 부소장의 질문에 이스칸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같은 개도국 출신인 우리로서는 가급적이면 개도국에 반도체나 컴퓨터기 술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검토해 보았으나 마땅 한나라가 없었다. 남미를 대상으로 생각했으나 남미인들은 도대체 반응이 없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하겠다고 하지만 그 후로는 응답이 없다. 내 조국 인이집트는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죄다 외국으로 빠져나가 버리고 없다. 인도의 경우 뉴델리에 전자기술연구소를 하나 세워주려면 각 주마다 하나씩 세워 줘야 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마르코스와 줄이닿으면 돈벌이가 되고 닿지 않으면 돈벌이가 안되는 거니까 세계 은행 차관 이 별 쓸모가 없다. 아무리 따져봐도 개도국으로서는 한국밖에 없다"그렇게 해서 2천9백만달러의 차관이 결정됐지만 사업계획의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연구소내의 전문가의 부족, 경영 미숙, 간부간의 갈등 등 여러가지 요인 이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외자를 뒷받침할 내자가 넉넉치 못한 것도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두 개의 연구동을 지을 내자가 부족하자 연구소측은 반도체담당부소장인 김만진의 주장에 따라 반도체연구동의 건립부터 서둘렀다. 그 결과 반도체연구동이 완공된 것은 1981년 4월이었고, 반도체 연구시설이갖춰진 것은 그해 10월이었다. 컴퓨터연구동은 이듬해 5월에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