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수치감은 차라리 쌀을 얻으러 고모 집에 가서 기다리고 서 있을 때보다 더 강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십년 전의 기억이지만, 아버지가 공사판을 따라 집을 나간 지 여러 달이 지나도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진 우리는 굶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란 어머니와 형을 포함한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형에게 고모 집에 가서 식량을 얻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은 가지 않으려고 했고, 나를 시켰다. 나 역시 가지 않으려고 하면 형이 때리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고모 집에 갔다.
고모 집에 간 나는 먹을 것을 얻으러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빈둥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빈손으로 고모 집 대문을 나설 때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고, 어쩌면 외로움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때로 외로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움푹 파인 눈과 형의 신경질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왜 안가고 돌아왔느냐는 고모의 질문을 받고도 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수치감을 느끼면서 나는 돈을 빌려 주거나 쌀을 달라고 했다. 그제야 고모는 놀라면서 그녀 오빠(나의 아버지)에 대해 증오에 담긴 욕설을 해대었다. 처자식을 두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기에 이 꼴로 만들어 놓는가 하는 비난이었다. 고모의 욕설을 들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수치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버지를 욕하는 고모의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많게는 십여 명씩 패를 지어 다니기도 하고, 어느 때는 서너 명씩 짝을 지어 토목공사 하청을 맡아 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벌어들인 돈을 집으로 보내주지 않고,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여자와 교제했다. 여자를 사귄다는 말은 아주 점잖게 표현한 것이고, 실제는 현지에 있는 술집 여자를 알면서 계집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예쁠수록 아버지는 집에 돈을 보내는 일에 소흘했다. 그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목걸이라든지 팔찌, 반지 등을 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나간 시절, 이제 열아홉살인 내가 지나간 시절 운운하면서 회상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지만, 과거 일을 하나 하나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취업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