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0회-NTT도코모의 세계 항해

오보시 고지(大星公二) NTT도코모 회장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입동이 지나 한강물이 차갑다. 강바람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그렇지만 오보시 회장은 초겨울에 접어들었다는 서울 날씨를 느끼지 못한다. 짧은 일정 때문에 난방이 잘 된 호텔과 차 속에서만 보내다시피 해 바깥 날씨를 맛볼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서울방문의 흡족함이 속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지난 9일, 이틀간의 방한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오보시 회장은 쉐라톤워커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SK텔레콤과의 지분 협상을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오보시 회장은 어떻게 얘기하는 게 좋을지 잠깐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SK텔레콤과는 오래전부터 협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뭔가 획기적인 진전을 기대했던 한국 기자들의 눈에 실망스러운 빛이 내비쳤다. 오보시 회장은 괘념치 않았다.

대신 성공비결에 대해서는 신나게 답변했다. 이번 방한도 「NTT도코모 급성장의 비밀」이라는 한국어판의 출간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그랬다. 누가 오늘의 도코모를 예상이나 했을까.

강물을 바라보는 오보시 회장의 기억은 8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난 NTT도코모를 자신이 덜컥 맡게 됐을 때 그는 암담했다. 빚투성이에다 고집불통인 직원들로 가득한 이 회사를 어떻게 살리라는 것인가.

말이 분사지 사실상 NTT가 살기 위해 병든 몸을 잘라내는 것에 불과했다.

영업, 경영기획 등을 두루 거쳐 NTT의 차세대 경영자를 자임했던 그로선 분통이 터졌다. 『나에게 이런 자리에 앉히다니.』 오보시 회장은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자신을 두고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입방아도 무성했다.

한때 그는 회사를 떠날 생각도 가졌다. 그래도 겉으로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워낙 속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수백통의 고객들 투서를 읽고 난 다음이다. 고객들의 편지는 서비스에 대해 한결같이 불만으로 가득찼다.

『불만만 개선해도 가입자는 크게 는다』고 생각한 오보시 회장은 곧 보수적이고 기술 위주인 NTT 문화를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철저히 고객 위주의 조직으로 말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제품 개발기간을 단축해 원가를 줄였고 줄인 만큼 서비스료를 낮췄다.

불만 투서는 줄었고 가입자는 크게 늘어났다. 97년까지 5년동안 가입자는 10배나 늘어났다. 그래도 오보시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보시 회장은 친하게 지내는 매킨지의 컨설팅팀장인 남바 도모코씨과 자리를 갖게 됐다.

남바는 이동통신사업의 성패는 무선전화가 아니라 인터넷접속이나 게임과 같은 부가서비스의 질이라고 충고했다. 오보시 회장의 귀가 활짝 열렸다.

『바로 이거야.』 그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데이터를 마음대로 주고받는 데이터통신망의 구축에 번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공짜인 인터넷 콘텐츠를 유료화한다니.』 처음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려는 가입자들의 욕구가 워낙 높았다.

도코모 신화를 이룬 「i모드」는 이렇게 탄생했다.

「i모드」의 폭발적인 인기는 도코모를 8년 만에 매출 4조엔(44조원), 시가총액 30조엔(330조원)의 거대 기업으로 만들었다.

가입자만 3200만명으로 도이치텔레콤을 제치고 일약 세계 2위 업체로 도약했다. 남은 고지는 영국의 보다폰에어터치뿐이다.

크리스 젠트 보다폰 회장은 에어터치와 만네스만 등 끊임없는 인수 및 합병(M&A)을 성사시켜 돈방석 위에 앉았다. 전형적인 일본인이라 할 만큼 겸손한 편인 오보시 회장도 내심 배가 아팠다.

『내가 젠트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그가 나처럼 황무지를 일궈보기나 했을까.』

그래도 아직 보다폰의 장벽은 높은 게 현실이다. 가입자가 무려 5900만명에 이른다.

『적을 이기려면 적과 똑같이 하라.』 「흉내바둑」을 두는 것 같아 겸연쩍기는 했으나 전술로는 효과적이었다.

보다폰의 강점은 세계를 넘나드는 협력이었다. 자국내 통신서비스만으로 높은 시설투자를 감당하기는 힘들다. 다행히 이동통신의 대세는 글로벌 통신이었다. 로밍서비스든 공동 시장 개척이든 유수의 외국 통신업체와 협력이 살 길이었다.

도코모는 마치 태평양전쟁 시절 일본 해군의 함대처럼 세계 시장을 향한 항해에 들어갔다. 한 항공모함은 홍콩 허키슨사를 돌아 네덜란드 KPN모바일을 거쳐 영국 오렌지사를 향했다.

다른 한 척은 미국의 보이스스트림, 아메리카온라인(AOL) 등에 이어 핀란드 소네라사 등 북유럽 항구에 도착했다.

나머지 한 척은 한국의 SK텔레콤을 통해 중국의 이동통신사업자를 향해 달렸다.

항로는 달랐지만 모든 항공모함의 최종 기착지는 중국이다. 중국의 이동통신시장은 90년대 하반기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올해말이면 GSM 가입자가 6000만명을 훨씬 웃돌 것이다.

CDMA 가입자까지 늘어나면 앞으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이동통신 시장으로 급부상한다. 이 시장을 공략하지 않고서 세계 통신시장 제패를 감히 입에 담지 못한다.

그런데 중국은 유독 일본에 대해서는 경계의 눈초리가 매섭다. 중국의 차세대 통신시스템도 일본과 유럽 방식 대신에 한국의 CDMA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래서 도코모는 우회전략 차원에서 SK텔레콤과의 협력에 적극 나섰다. 더욱이 경쟁사인 보다폰이 중국의 제1 이동통신사업자인 차이나모바일에 25억달러나 투자한 상태라 갈 길이 바쁘다.

SK텔레콤이 중국 시장에 들인 공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부와 업계의 핵심 인물은 물론 교수에 이르기까지 SK텔레콤은 거미줄처럼 인맥을 쌓고 있다. 어떤 사업이든지 중국 진출의 첫째 관문은 바로 인맥이다.

가입자를 주체하지 못해 오히려 줄여야 할 입장인 한국의 제1 이동통신사업자인 SK텔레콤도 도코모와의 제휴가 시급한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이지만 세계에서 누가 이를 알아줄 것인가.」 SK텔레콤 역시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려면 한발 앞서 글로벌화한 도코모를 전략적인 파트너로 삼을 필요가 있다.

SK는 사업 전략뿐만 아니라 불안한 지분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도 도코모를 우호 지분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증시 침체로 그 시점을 일정보다 늦출 수밖에 없다.

전날 오보시 회장은 조정남 SK텔레콤 사장과 만찬을 가졌다. 조 사장은 지리한 동기-비동기 논란에 지쳐 있는 듯했다. 오보시 회장은 애써 비즈니스를 에둘러 갔다.

두 사람 모두 식탁에서 비즈니스를 꺼내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으나 서로 말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오보시 회장은 저녁 식사후 SK텔레콤에의 지분 투자는 IMT2000사업권이 결정되는 내년 초로 늦추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업권 향방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SK텔레콤과의 중국 시장 공략에서 긴밀한 공조체제를 펼칠 것을 새삼 확약했다. 이번 방한의 목적도 이것이었다.

사실 도코모 역시 당장 지분 투자할 만큼 곳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한국 증시처럼 나스닥도 침체돼 자금 조달이 매끄럽지 않다.

보다폰 흉내를 내느라 자금줄은 동이나고 있다. 마치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넘어지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셈이다.

오보시 회장이 보기에 중국은 쉽사리 넘기 힘든 나라다.

중국정부는 지난 98년 느닷없이 군부와의 CDMA사업 추진계획을 철회하더니 언제인지 모르게 차이나유니컴을 통해 다시 재개할 뜻을 비춘다. 처음에는 차이나텔레콤에서 떨어져 나온 차이나모바일을 육성하려는 듯 하더니 언제인지 모르게 차이나유니컴에 힘을 몰아준다.

오보시 회장은 어쨌거나 대중국 진출 창구로 SK텔레콤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휴한 지 벌써 6년째니 자신의 안목이 스스로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다.

『젠트가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어.』 산전수전을 거친 오보시 회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자만심도 들었다.

『조만간 중국시장이 열리면 도코모는 SK텔레콤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으리라. 보다폰은 변방 언저리만 헤매고 있겠지.』

그의 얼굴에는 그 짧은 시간에 보다폰에 대응할 대연합군을 건설했다는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물론 그에게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세력인 도이치텔레콤과 AT&T가 아직 합류하지 않았다. 이들은 별도의 연합군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코모는 이미 AT&T의 무선사업부문의 일부 지분을 인수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그렇다 해도 대세는 이미 우리쪽으로 기울고 있다. 중국 업체만 잡으면 된다. 이대로 가면 보다폰을 곧 누를 수 있다.』

오보시 회장은 기내 밖으로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다음에는 서울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야지』하고 생각하는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