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9월 8일. 제물포에 청국 배 하나가 정박했다. ‘영청호’였다.
조선에 최초의 정보통신 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전선과 전신기, 공기구, 기술자를 태운 ‘영청호’의 선상에는 오는 중에 심한 풍랑을 만난 탓으로 싣고있던 기자재가 함부로 널려져 있었고, 배에 타고있던 사람들도 많은 고생을 한 터라 병이 난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큰 키에 콧수염을 기른 서양인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인 정보통신 기술자로 입국한 그의 이름은 미륜사(彌倫斯), 그의 조국 덴마크에서는 뮐렌스테트(H. J. Muhlensteth)라고 불렀다.
26세이던 1881년 덴마크 대북부전신주식회사에 입사한 미륜사는 곧바로 청국으로 파견근무를 왔다. 당시 대북부전신주식회사는 세계를 잇는 전신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청국도 그 전신망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륜사는 그동안 청국의 전신(電信)국에 근무하다 조선의 서로전선(西路電線) 가설의 기술감독 자격으로 서양인으로서는 최초의 정보통신 기술자로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서로전선은 이미 밝혔듯이 갑신정변 후 청국의 요청으로 인천과 서울,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의 전신선과 연결하는 정보통신선로로 조선에 가설된 최초의 육로 전기통신시설이었다. 명목과는 다르게 청국의 필요에 의해 가설되는 통신시설이었지만, 이땅에 최초로 가설된 정보통신시설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미륜사를 태운 ‘영청호’가 제물포로 들었을 때 태풍이 지나간 9월의 태양이 찬란했다. 미륜사가 자라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는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태양이었다. 하지만, 미륜사는 그 태양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몸져누워야 했다. 중국에서 제물포까지의 뱃길,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몰아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겪은 배멀미로 정신은 혼미상태에 빠졌고, 온 몸이 불같이 뜨거웠다. 뭍으로 내리자마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혼미상태에서 미륜사는 한 여인의 감미로운 손길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여인. 미륜사는 그 여인이 자신의 장래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태풍이 지나간 조선의 하늘은 높고 맑고 푸르렀다. 따가운 태양, 하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그리고 산이 있었다. 알맞게 높고 알맞게 구릉진 산.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들판의 벼. 소가 한가롭게 메어진 느티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 깨끗이 씻겨진 맑은 냇가. 미역감는 아이들. 양지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 유난히 두께가 두꺼운 초가지붕의 이엉.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더러웠다. 깁고 또 기운 무명옷은 땀에 절어 있었다. 옷뿐만이 아니라 생활도 가난에 절어 있었다. 고약한 냄새도 났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마을은 정리되지 않았으나 정겨웠다. 언어 소통은 불가능했지만 순박한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미륜사의 생김새만으로도 신비로워 했고, 경외하는 눈빛을 던지곤 했다. 미륜사는 그들이 좋았다. 자기의 조국 덴마크와 중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비로움과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인천과 한성을 잇는 전신선 가설 공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이미 마련된 설계서와 그 설계서 대로 배치되어 준비된 목주(전신주)를 활용하여 전선을 가설했다. 전신선 가설작업은 조선의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로, 전선에 전기를 통해 양쪽 끝에 전신기를 설치하여 수많은 글들을 순간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정확히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이들은 매우 빨리 기술을 배우고 일을 처리했다. 전주를 심고 지선을 매는 방법과 두 선의 절연저항을 재는 방법, 낙뢰 방지를 위해 설치하는 접지도 쉽게 배워 처리했다. 새로운 문물의 도입이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이었다. 전신기술에 대한 사전 지식과는 별도의 문제였다. 당시 조선에는 청국이나 일본에서 전신기를 보고 온 사람들이 몇 명 있었을 뿐이었다.
전주를 세우고 전선을 늘일 때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을 했다. 주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생전 처음보는 전선가설에 대한 호기심만큼 양복을 입은 미륜사도 구경의 대상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이를 업고 앞가슴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여인들도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 공사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어 부평과 양주를 거쳐 보름만에 양화진에 다다랐다. 한강이 있었다. 한강, 아름다웠다. 기본 설계는 시흥을 거쳐 서강을 건너 한강 강바닥으로 전선을 가설토록 되어 있었으나 미륜사의 주장으로 양화진에서 강물 위로 가설하여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 지형조건이 좋았다. 설계변경으로 인하여 가설구간이 짧아졌고, 공사기간을 줄일 수 있었다.
태풍과 함께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 아직 많이 줄지 않아 전선을 싣고 가설하는 배의 운항이 어려웠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전신선을 지탱하는 철선을 실은 배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하중을 받고 있었으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합정동 산등성이 위쪽에 여러 개의 목주를 심고 철선을 먼저 가설한 다음 전선을 그 철선에 걸어 당기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가장 어려운 한강을 건너는 공사를 마침내 끝냈다.
한강을 건넌 전선 가설공사는 곧바로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 조선의 서울이었다.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계속 느꼈던 산에 대한 아름다움은 한양의 주변 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최고 173m밖에 안되는 미륜사가 자라온 덴마크의 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조선의 산들은 지니고 있었다.
1885년 9월 25일. 전신선은 한양까지 가설이 완료되었다. 서로전선의 완공이었다. 같은 달 28일 한성전보총국이란 이름의 화전국이 개국되어 조선역사 이래 처음으로 인천과 한양간 전신이 운영되었다. 한성전보총국은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에 있던 사역원 자리(현재의 세종문화회관 부근으로 전기통신발상지 탑이 서있는 장소)에 있었다.
전선 가설공사는 곧바로 평양과 의주를 향해 다시 시작되었다. 청국 전신선과의 연접을 위해 의주까지 가설하는 것이었다. 미륜사는 아름다운 한양을 떠나야 했다. 아쉬웠다. 그동안 자신을 치료해주던 여인과도 작별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이 들려주던 거문고 소리도 이제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하늘과 태양과 산, 추수가 시작된 들판의 아름다움은 조선 땅 어느 곳에도 있었다.
서울과 의주간 전신가설은 1885년 11월에 완료되었다.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총 연장 1053리의 전신선이 완공되어 인천에서 청국까지 전신선을 통해 통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미륜사는 공사를 끝내면서 일단 청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덴마크의 대북전신주식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조선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는 청국 전신국 사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향의 가족들과 백야, 하얀 눈,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조선의 거문고 소리가 미륜사의 혼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 여인이 들려주던 거문고 소리였다. 순박한 조선 사람들의 그 눈빛도 그리웠다.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자신의 눈에 고정시키던 조선 젊은이들의 모습도 다시 보고싶었다.
조선의 정보통신 시설에 참여한 최초의 서양인 통신기술자 미륜사는 다시 조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며, 앞으로 30년 동안 먼 이국 땅에서 파란만장하게 펼쳐질 또다른 삶의 시작이기도 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