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국내 IT산업은 광속 경제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대마불사’라는 용어를 낳았던 구 경제의 패러다임은 한보·대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IMF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IMF 이후 불기시작한 벤처 열풍도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IMF 이후 벤처신화를 온 국민에게 심어주었던 벤처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그동안의 방만한 경영, 수익모델 부재 등을 극복하지 못해 지난한해 실적부진에 시달리거나 CEO가 교체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세계적인 경제전문 월간지인 블룸버그마케츠는 12월호 ‘CEO들이 해고당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 10월까지 S&P 500대 기업 중 12%인 58개사의 CEO가 스스로 물러났거나 쫓겨났다고 지적했다.
퇴출된 CEO들의 특징 중 하나는 본 사업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과 같은 비전공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출한 CEO였다. 경제가 좋았을 경우 신규사업 진출, M&A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공격적인 CEO가 환영받았지만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자 이러한 공격적인 경영이 짐으로 작용,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같은 공격적인 CEO가 퇴출 1순위가 되고 있다고 이 잡지는 지적했다.
이렇게 되자 CEO들은 다시 자금흐름이나 수익개념, 경비절감 등 기업경영 전략 원칙에 충실하게 회귀하기 시작했다. 블룸버그는 지난 98년부터 2000년 5월까지 기업 최고위직에 오른 CEO 중 가장 좋은 경영실적을 올린 CEO들은 모두 인터넷 등 새로운 사업 유혹을 이겨내고, 본업에 충실했던 경영자들로 나타났다고 결론을 맺었다.
본지가 국내 60여개 IT업체들을 대상으로 2002년 경영목표를 조사한 결과 많은 기업들이 경영의 기본원칙에 충실하겠다는 답변을 해왔다. 몇 년간 시행착오 끝에 국내기업들이 깨달은 것은 기본원칙에 충실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교훈이었다.
◇손익우선=많은 기업들이 내년 경영목표의 우선순위에 매출 확대보다도 손익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매출이 몇 조, 몇 십조에 이르더라도 손익이 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실제로 미국 주식시장의 경우 예상 매출 목표보다도 예상수익을 올렸느냐에 따라 기업의 주가가 더 영향을 받고 있다. 인터넷 기업들의 경우 더 치열하다. 성장잠재력으로 평가받던 시대가 지나고 수익을 창출하느냐 못하느냐가 이제는 퇴출을 결정짓는 요소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영 안정화=지난 몇 년간 국내 기업들은 세계 각국에 판매법인, 생산법인, 서비스 법인 등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 경영에 힘써왔다. 이는 현지 저임을 바탕으로 하는 가격 경쟁력 확보, 무역장벽 극복 등 다양한 측면이 있었지만 2002년에는 글로벌 경영을 더욱 효율적으로 관리, 경쟁력을 배가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를 위해 공급망관리(SCM) 등 보다 전문화된 경영기법이 정착할 것으로 보인다. 또 KT나 SK텔레콤 등 내수위주의 사업을 진행해온 통신서비스업체들은 내년을 계기로 해외시장에 본격 진출할 계획이다.
◇투명경영=많은 기업들이 주주들과 종업원들의 이익 및 비전공유를 위해 투명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엔론과 대우의 예에서 보듯이 막대한 분식결산이 결국 이 회사들을 회생하기 어려운 처지로 이끌었다. 기업들이 고객이나 주주, 종업원으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직이 최고라는 판단이다. 많은 기업들이 사외이사제도, 감사위원회 제도를 운영하고 분기별 회계법인 감사, 경영실적 자진 공시 등 기업 투명성 향상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방침이다.
◇스피드경영=많은 대기업들이 2002년에도 스피드경영을 경영목표로 꼽았다. 스피드경영은 광속경제에서는 필수요소다. 새로운 제품이 하루가 멀다않고 나오는 지금 경쟁사에 몇 일, 몇 달 뒤져 제품이 출시될 경우 바로 뒤처지게 된다. 소비자는 기업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기의 경우 전세계 고객이 어느 지역에서 주문하더라도 5일 이내에 공급해주는 5일납기에 도전한다.
◇고객만족=매년 되풀이되는 경영목표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동안 많은 기업들은 사후 서비스를 고객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했지만 2002년에는 고객관계관리(CRM) 등 다양한 선진 경영기법을 동원해 고객과의 밀착도를 높일 계획이다. 또 기업고객에는 제조는 물론 물류·서비스까지 제공하는 토털 아웃소싱 서비스를 강화, 변화된 기업환경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기술투자 확대=2002년 국내시장 전망과 해외시장 전망이 밝지 않음에도 많은 기업들이 기술분야에는 투자를 확대해 나간다는 경영계획을 수립했다. 부품업체인 KEC는 내년 반도체 분야 R&D 투자비중은 반도체 매출의 2.5%에서 5%로 끌어올리기로 했으며 삼성전기는 기술개발에 전년대비 20% 늘린데 이어 기술인력을 대폭 확대키로 했다. 이미 가격 경쟁력에서는 중국 등 후발국가에 뒤처진 만큼 기술개발마저 뒤처질 경우 국내 IT산업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느껴진다.
◇인재육성 강화=기업의 경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력이다. 이 부분은 IMF 이후 많은 인재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대기업들이 더욱 실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2002년 경영키워드 역시 인재육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포함돼 있다.
삼성SDS는 전 직원중 10%가 개인별 맞춤교육을 받도록 하고 이를 통해 양성되는 인력에 대해서는 최고전문가로 육성할 계획이다. 또 업무종료시 실시되는 상시평가제도를 통해 파격적인 인센티브도 지급한다. KT는 석박사, 테크노-MBA 등 미래 경영리더의 중점육성을 통해 사원가치를 배가시키는데 노력할 예정이다
◇내부 화합=외부 경쟁력은 내부 결속에서 시작된다. 많은 기업들이 지속적인 구조조정으로 지친 사원들의 기를 살리기 위해 내부 화합에도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LG필립스LCD의 올해 중요한 경영모토 중 하나가 ‘열린마음’으로 삼았다. 전 임직원의 열린 마음을 하나로 묶어 내부업무 처리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시장과 고객에 신속하게 대응하겠다는 뜻이다. 삼보컴퓨터는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인사정책을 마련, 시행하는 등 직원들의 지친 심신을 어루만져줄 예정이다.
◇지속적인 구조조정=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진행해왔지만 올해에도 구조조정은 지속될 전망이다. 구조조정은 핵심사업에 집중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은 지속적으로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또 조직적으로도 핵심역량에 집중하되 간접부서의 경우 외부 아웃소싱이 경쟁력이 있다면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아직도 많은 기업들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제 구조조정은 일상적인 행사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일류제품 확보=IT업체간 경쟁이 무한경쟁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류제품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일류제품을 못내놓는다면 이제 수익과 매출 모두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비록 국내 업체들이 IT분야에서 1위의 시장 점유율을 올리고 있는 품목도 점차 늘고 있지만 밀려나는 제품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제는 일류·이류·삼류가 모두 공존하는 시대가 아니라 일류가 모든 시장을 독식하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