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16)교수 경쟁력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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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과대학 A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녹음기’로 통한다. 강의내용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시키는 과제는 물론 강의시간에 주고받는 농담조차 10년 전과 똑같다. 학생들은 A교수의 수업을 듣지 않아도 기출문제만 있으면 기말고사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이 대학 공대 대학원생 B씨는 학교생활이 지옥과 다름없다고 토로한다. 지도교수가 미개척분야에 대한 연구를 학생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협력해 어렵사리 논문을 하나 완성하면 지도교수의 이름이 논문작성자로 올려지는 일도 다반사다. B씨는 “대학에서는 더이상 배울게 없다”며 한탄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의 자질문제가 거론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 년 동안 논문 한편 발표하지 않는 교수들은 부지기수다. 연구는 고사하고 강의준비조차 게을리하는 교수도 수두룩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 신입생은 1학기만 지나면 교수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 산업계도 대학교육이 부실해지면서 대졸 신입사원 재교육에 매년 1조원 이상의 거금이 낭비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최근 과학기술부가 미국 ISI(Institute for Scientific Information)사가 제공한 과학논문색인(SCI)을 분석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학교수들이 얼마나 연구에 게으른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표참조

 이 자료에 따르면 국내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서울대가 논문 발표수로는 세계 40위(2591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KAIST는 158위(1179편)로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9218편으로 1위를 차지한 하버드대나 6439편을 발표한 도쿄대와 비교하면 뒤처져도 한참 뒤처졌다. 논문 발표수만 놓고 보면 국내 최고 대학의 교수 수준이 ‘미국 중하위권 주립대 수준’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물론 서울대의 경우 SCI 논문 발표수에서 지난해 세계 55위에서 무려 15계단이나 상승했다. 그러나 아직 절대적인 수치에서 연구실적이 크게 떨어진다.

 논문수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논문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더 큰 문제다. SCI를 기준으로 국내 교수들이 최근 5년간 발표한 논문의 평균 피인용도는 1.96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상위 10개국 평균(5.72회)은 물론 세계 평균(3.98회)에도 턱없이 모자란 수치다. 이 때문에 교수사회에서조차 성과주의에 급급해 경쟁력 없는 논문을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논문수가 적은 것은 교수들의 낮은 어학 경쟁력도 한몫하고 있다. 연구를 하고도 영어실력이 모자라 ‘국내용’으로 전락하는 논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는 연구나 번역업무를 대학원생들이 대신해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강의 역시 부실한 것은 마찬가지다. 컴퓨터공학과의 경우 서울대를 비롯해 거의 모든 대학이 아직 386컴퓨터 CPU를 주요 강의내용으로 삼고 있다. 또 전기공학과·전자공학과 등 IT관련학과 역시 60년대 원서나 개론서를 그대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수들이 강의준비를 소홀히 하면서 세상은 디지털시대를 내달리는데 상아탑은 진공관 시대에서 그대로 멈춰서 있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게임·애니메이션 등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문화콘텐츠 관련 학과에는 자격미달 교수들이 넘쳐난다. 문화관광부가 발간한 2000년 문화산업백서에 따르면 디지털영상·출판·게임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국내 전문인력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학사급 교수가 게임학과 학과장을 맡는 대학도 생기고 있다. 또 교수인력 확보가 어렵다 보니 시각디자인·컴퓨터그래픽 등 유관 학과 전공자를 교수로 임용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교수들의 낮은 경쟁력은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에 반영돼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지난해 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업이 부담하는 대졸 신입사업 재교육비를 산출한 결과, 연간 1조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돈도 돈이지만 재교육에 투입되는 시간비용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국력이 소진된 셈이다. 서울대나 KAIST 출신의 우수한 학생들이 외국의 대학원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배울만한 스승이 없는 것이 일차적인 요인이다.

 물론 모든 대학교수들이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세계적인 석학에 견줄만한 유능한 교수도 적지 않다. 문제는 한국 교수사회의 경직된 조직문화가 의욕적인 교수들까지 도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 수석연구원은 “미국이나 선진국의 경우 연구성과에 따라 교수들의 대학 이동이 잦는 등 실적에 대한 보상이 적절히 이뤄지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교수사회는 이런 자극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극히 미약하다”며 “교수들이 이런 경직된 시스템에 안주하다 보니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에 매진할 수 없는 환경도 문제다. OECD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수 1인당 학생 비율은 28.3명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교수 1인당 평균 강의시간도 15시간에 육박, 6시간 정도의 선진 유명대학을 크게 웃돌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KAIST 교수에서 온라인게임업체 CEO로 자리를 옮긴 양재헌 박사는 “강의부담도 부담이지만 우리나라 교수들은 연구와 강의 외에 행정업무까지 전담하다시피 한다”며 “처우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학구열이 꺾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말했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