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화끈거렸다. 토요일 저녁,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X맨’의 실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X맨’은 쇼 프로그램의 한 코너였다. 남녀 연예인이 두패로 나눠 게임을 벌이는 그렇고 그런 쇼 프로그램이었다. 다만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출연자 가운데 ‘X맨’을 찾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였는데, 그날 밤 ‘X맨’은 최근 TV 출연이 잦은 가수 타블로였다.
‘X맨’이라…. 뭔가 범상치 않은 이 단어의 실체는 이랬다. 몰래 적을 도와주는 일종의 스파이같은 존재. 한마디로 적보다 더 무서운 우군을 ‘X맨’이라 불렀다.
‘X맨’의 미스터리가 풀리자 창피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프리스타일’ 속에서 난 ‘X맨’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혹시 ‘X맨’이 아니냐고 우리편이 가끔 물어오곤 했는데 난 그게 무슨 뜻인 줄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식스맨’의 잘 못된 물음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적보다 더 무서운 ‘X맨’이라…. 자존심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 것 같지 않았다.화랑과 헤어진 후 틈틈이 ‘프리스타일’에 접속했다. 회사든, 집이든 메일을 확인한 뒤 습관적으로 ‘프리스타일’을 한판 하곤 했다. 노트북과 PC의 인터넷 초기화면은 어느새 ‘프리스타일’을 서비스하는 조이시티로 바뀌었다.
“아빠 게이미(게임) 하지 말고 나랑 놀자.”
네살박이 딸 지원이가 보채는 바람에 아예 PC방으로 달려간 것도 일주일새 두 번이나 됐다. 소위 말하는 게임 중독이 이런 것일까. ‘프리스타일’은 한번 시작하면 쉽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자꾸 우리편이 지면 열을 받아서, 이기면 들뜬 기분에 자꾸 게임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새 난 딱 300번의 경기를 치렀다. 한 경기당 5분씩 무려 25시간을 ‘프리스타일’에 매달린 것이다. 경기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넉넉잡아 30시간은 컴퓨터와 씨름한 셈이다.
가끔 게임기자라고 하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무시간에도 마음 놓고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뉴스는 게임 속보다 게임 밖에서 더 많았고, 주로 게임산업을 취재한 나로서는 일주일 내내 게임을 하지 않은 적도 많았다. 이 때문에 ‘프리스타일’ 고수에게 배운다 코너를 통해 비로소 게임 전문기자로 태어난다는 기분도 들었다.하지만 나의 도전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것과 같았다. 50승 270패, 승률 15%. 1시간 내내 게임을 해도 한번 이길까 말까 했다. 경기를 마치면 우리편은 금새 떠나버렸고, ‘X맨’이라며 날 강제퇴장(강퇴)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3점슛과 수비불안이었다. 슈팅가드인 나로선 가끔씩 3점슛을 작렬해 상대의 기를 꺾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3점슛은 번번이 블록당하거나 빗나가기 일쑤였다. 가끔 ‘슈가님 3점슛 자제를…’이란 우리 편의 항의성 메시지도 올라왔다.
반대로 상대팀 슈팅가드의 3점슛은 던지면 던지는대로 들어가는 악몽이 연출됐다. 슈팅가드 수비를 전담해야 할 내가 종종 찬스를 내줬기 때문이다.
강퇴의 수모를 꿋꿋이 견디다 못해 사부 화랑을 메신저로 찾았다. 마침 화랑은 접속 중이었다. ‘X맨’으로 전락한 그동안의 사연을 전하자 화랑은 ‘ㅎㅎㅎ’로 응답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플레이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예컨대 슛 성공률이 떨어진다면 어시스트와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스를 만드는 것이고, 반대로 찬스를 주지 않는 것이에요. 3점슛을 하나 넣는 것보다 스틸하나가 더 값진 법이에요. 2점슛을 넣은 뒤 스틸을 성공하고 또 2점을 넣으면 4점차로 벌릴 수 있으니까요.”
화랑은 슈팅가드 특유의 빠른 발을 이용해 패스루트를 파악하고 가로채기를 시도할 것도 함께 주문했다. 그리고 마음놓고 경기를 할 수 있는 팀을 구성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동료로부터 욕을 들을까봐 또는 강퇴당할까봐 주눅이 들면 절대 실력이 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스포츠에서 심리상태가 선수들의 컨디션에 지대한 영향을 주듯 ‘프리스타일’도 마찬가지라고 조언했다.화랑의 조언은 이미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었다. 찬스가 나면 3점슛을 날리고, 상대의 찬스를 철저하게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손은 따로 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 각오를 다졌다. ‘찬스를 만들자 그리고 찬스를 막자….’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문구가 들어왔다. ‘성인대화방♡ 아, 오빠- ♡’
방 이름 치고는 정말 재미있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난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파워포워드를 만났다. ‘위그니’라는 아이디를 가진 그는 레벨이 21이었지만 플레이 수준은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사정을 채팅으로 전해듣고는 기꺼이 같은 편으로 활약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위그니’는 내가 기자라는데 호감을 갖는 눈치였다.
우리는 호흡이 잘 맞았다. 나도 3점슛보다는 어시스트로 경기를 풀어갔다. 31대 20, 28대 22. 2번 연거푸 대승하는 그야말로 ‘파란’이 연출됐다.
“잘 하시네요.”
‘위그니’의 격려가 더욱 힘이 됐다. 1시간동안 9번의 경기를 치르는 동안 우리는 딱 1번 밖에 지지 않았다.
‘위그니’는 3점슛을 날릴 때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이스패스를 받으면 지체없이 슛을 던질 것과 수비가 가로막으면 슛하는 시늉을 하며 수비의 블록을 피해 슛을 날리라고 했다. ‘위그니’가 던져준 나이스패스를 바로 3점슛으로 연결하면서 난 자신감이 붙어갔다.
화랑이 그토록 강조하던 ‘마음 맞는 플레이어’의 위력을 알 것 같았다. ‘위그니’는 한 시간 정도 게임을 즐기다 떠났다.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도 잠시 게임을 중단하고 게임속 ‘스킬샵’으로 갔다. 거금 3000원을 투자해 게임속 캐쉬도 충전했다. 그리고 ‘뒤돌아 3점슛’이라는 스킬을 1600 캐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뒤돌아 3점슛’은 수비수가 예상 못할 경우 블록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는 일종의 ‘필살기’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제 고수로 가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화랑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다음주에 1대1로 한번 붙자고, 연습 많이 할테니까.”
화랑이 농담반 진담반 답장을 날려왔다. “넵.... 연습 많이 하세요. 전 연습 안 할게요..ㅋㅋㅋ”
<장지영기자@전자신문, jyajang@ 사진=한윤진기자@전자신문, p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