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외출

한류의 중심인물 배용준의 출연작이어서가 아니라,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로 삶의 섬세한 떨림을 예민하게 포착한 허진호 감독의 다음 작품이어서 기대를 한 ‘외출’은, 그러나 너무 무미건조했고 담담했다.

전작들에 비해서 훨씬 극단적인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는 절망적인 삶의 벼랑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지 못했고, 오래된 주간지의 박스 기사로 너무 낯익은 소재는 더 이상 신선함을 가져오는 장치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허 감독의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상의 가시적 삶 뒤에 숨어있는 삶의 본질이다. 그는 몇 겹의 허상을 들춰내고 삶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의 움직임은 더디고 완만하지만 그는 가려진 삶의 진실을 화면에 드러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의에 가득 찬 삶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고, 우리가 마침내 그 본질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그것은 훨씬 더 멀리 사라져 버린다. 삶이란 처음부터 패배가 내정되어 있는 게임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분)의 직업은 사진사였다. 그는 움직이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관에서 정지해 있는 인물들을 카메라의 렌즈로 바라본다. 사진관 렌즈에는 대상이 거꾸로 뒤집혀서 보인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 분)는 녹음기사였다.

소리를 채집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그는 들판에 서서 헤드폰을 끼고 마이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바람소리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빛이다. ‘외출’의 주인공 인수(배용준 분)는 조명기사다. 이렇게 허진호 감독의 인물들은 빛과 소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의 외연이 빛과 소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안에 내포된 진실이다.

자신들의 배우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 삼척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달려온 인수와 서영(손예진 분)은 각각 그들의 부인과 남편인 수진(임상효 분)과 경호(류승수 분)가 불륜관계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수진은 남편인 인수에게는 출장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경호와 밀월여행중이었다.

그들이 탄 차량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차와 부딪치면서 상대 차의 운전자를 죽게 만들었다. 그들 역시 중상을 입고 의식불명인 채로 응급실에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인수와 서영은 병원 옆에 있는 모텔에 방을 잡고 각각 자신들의 배우자를 간호한다. 그들의 모텔 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거의 마주하고 있다.

경찰로부터 수진의 유류품을 전달받은 인수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그 안에 저장된 문자 메시지를 본다. 서영 역시 디지털 카메라 안에 저장된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자신의 남편인 경호가 수진과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같은 절망에 사로 잡혀 있는 인수와 서영은 가까워진다.

‘외출’은 그렇게 만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가장 절망적 상황 속에서 만난 그들은 똑같은 감정으로 서로를 갈망한다. 그 속에는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복수감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만약 사고 이전에 혹은 이후에, 서로 연결고리 없이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이 질문을 서영은 인수에게 한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배우자의 불륜을 알고 있고 각각 그들의 배우자로서 만난 것이다.

이런 내러티브는 주간지의 일단 기사를 통해 우리들에게 낯익은 것이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도 이미 만들어져 있다. 허진호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극단적 상황 속에 놓여진 남녀의 섬세한 감정들이다. 그 미묘한 변화들이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연출은 전작들에 비해서 울림이 훨씬 적다. 많지는 않지만 열혈 마니아를 매료시킨 허진호 영화의 특징은, 긴장감 있는 여백이다. 결국 커다란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 있는 행간의 여백, 혹은 사건의 진실과 진실 사이에 놓인 권태스러운 일상의 여백. 그러나 ‘외출’에는 그것이 상실되어 있다. 나는 그 원인이 스타 배우의 마케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배용준이나 손예진은 크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극단적 상황 속에 빠진 인물의 절절한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배우들이다. 한류 열풍을 기대하고 투자한 투자자들이나 제작자들은 그들의 조합으로 스크린 속의 ‘겨울연가’를 만들어내 아시아 영화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욕심에 불타 있을지 모르지만, 서서히, 비가시적 세계의 본질에 접근해 들어가던 허진호 영화의 진중한 매력은, 무엇엔가 쫒기는 듯 서두르는 연출에 의해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그의 영화는 느리고, 행간의 여백은 풍부하지만, 그러나 이 미묘한 차이가 허진호 영화에서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스타 마케팅은 허진호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배우들 역시 조급함에 빠져 표피적인 연기에 머무르고 있다. 왜 관객들이 그들의 절망적 상황 속에 동화되지 못하는가,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