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김홍국 가비아 사장(1)

[결단의 순간들]김홍국 가비아 사장(1)

(1)길을 찾아서

 2005년 10월 19일 오전 9시. 증권선물거래소 종합홍보관의 전광판에 ‘㈜가비아 코스닥상장’이 새겨졌다. 사업 시작 후 8년만이다.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나거나 엄청난 노력을 더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난 내게 주어진 몇 번의 기회를 잘 잡았고 과욕으로 인한 퇴보 없이 나와 회사에 대해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학창시절 나는 이른바 386세대의 전형이었다. 전공인 사회학 중, ‘학’보다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과 학회와 노래패 ‘울림터’ 활동을 통해 이 땅의 현실을 알았고,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의 혼돈 속에서 어렵게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나는 길을 고민했지만 그 길은 직장생활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취직을 포기하고 무작정 책을 읽었다. 문화비평 동호회 활동을 하며 습작 수준의 글들을 끄적였다. 그렇게 2년여를 보낸 후 나는 빈손으로 고향 제주로 내려갔다. 감귤 농장에서 한달 동안 땀과 흙에 파묻혀 겨우 손에 쥔 돈 100여만원. 이 돈은 나로 하여금 푸르른 제주를 뒤로 하고 다시금 서울로 발길을 향하게 만든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동호회 활동으로 친숙한 PC통신 관련 사업을 하기로 하고 아는 지인의 사무실 한구석을 빌렸다. PC통신 접속자들에게 광고를 보여주는 솔루션을 개발하기도 하고, 온라인 언론 사이트 등을 만들며 사업으로의 길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1998년 드디어 가비아넷이라는 상호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홈페이지 제작 및 웹솔루션 개발을 주업으로 하는 가비아가 시작됐다. 1998년은 이전까지 전화 모뎀 혹은 종합정보통신망으로 대변되던 인터넷 서비스 대신 케이블 모뎀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한 해였다.

 특히 1999년에 이르러서는 기존 전화망을 활용한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제공되면서 인터넷 서비스는 연간 100%가 넘는 폭발적 성장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99년 5월말 한국인터넷정보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 이용인구가 1534만명으로 전년 대비 448만명이 늘었고 인터넷 서비스업을 전제로 하는 도메인의 등록 건수도 98년에 비해 2개 가까운 44만개로 증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가비아를 있게 한 도메인 사업의 시작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찾아 들었다. 98년 어느 날, 학교 후배였던 이청종(현 후이즈 대표이사)이 도메인 등록대행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도움을 요청해 왔다. 내가 처음에 그랬듯 사무실 한구석을 빌려주고 ‘whois.co.kr’ 도메인을 등록해줬다.

 당시만 해도 도메인 등록은 홈페이지 구축이나 호스팅의 부가서비스에 불과했다. 그러나 닷컴열풍으로 전체 인터넷사업이 급성장한데다, 엑슨-모빌닷컴으로 인한 스쿼팅(도메인 선점) 목적 도메인 등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도메인 등록은 100% 선입금 유료서비스였다. 들쑥날쑥한 매출구조 때문에 안정적인 사업운영이 힘들던 때에 도메인등록대행 사업은 좋은 캐시카우 역할을 할 것 같았다. 1998년 12월 도메인등록 웹사이트를 만든 후 부업삼아 하던 도메인등록대행 서비스는 1999년 9월 법인전환 때에는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주요 사업이 되었다. 가비아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khk@gab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