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눈높이도 경쟁력이다

[글로벌리포트]눈높이도 경쟁력이다

 1985년 4월, 한 무리의 일본인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이 캘리포니아의 라구나 비치에 살림을 차렸다. 도요타자동차가 럭셔리 브랜드의 고급차를 개발할 목적으로 ‘미국 부유층 생활’을 체험하도록 파견한 이들은 대표적 부촌을 골라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미국 부자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차에 대한 생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이 일화는 렉서스의 성공을 만든 도요타의 각오와 집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고급 기호도 돈이며 경쟁력이라는 무시 못할 사실이 숨어 있다. 기업 제품에 반영된 ‘고급 코드’는 대체로 그 나라 사회의 평균 수준에 따라간다. 나라마다 특화된 고급 제품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고 그 분야에서 오랜 세월 쌓인 ‘좋은 것에 대한 기호와 기준’이 반영된 것이다. 오랜 부자나라에서 고급스러운 기호가 발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산품 제조업이 몰락하다시피한 영국에서도 고급스러운 기호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분야가 있다. 벤틀리, 롤스로이스, 애스턴마틴으로 대표되는 최고급차는 핵심 부품과 생산 기술은 독일 등에 의지하지만 디자인과 설계는 영국에서 완성하는 ‘브리티시-엔지니어드’임을 강조하고 있다.

 디지털-아날로그 컨버터(DAC) 분야에서 독보적인 울프슨(Wolfson)은 영국 에든버러에 있다. 라우드스피커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인 B&W도 영국 기업이다. 미국 보스(BOSE)가 음향공학 연구를 바탕으로 소리를 설계한다면 B&W는 전문가의 귀와 취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튜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피커뿐 아니라 하이엔드 오디오의 세계에서 ‘브리티시 사운드’의 입지는 기술적으로만은 모자람이 없을 독일과 일본이 넘보지 못할 만큼 여전히 공고하다.

 혹자는 이런 ‘기호와 취향의 경쟁력’을 전통과 이름의 값일 뿐이라고 애써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무형의 것일수록 짧은 기간에 따라잡기가 힘든 법이다. ‘사람의 감각이 참 간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고급 와인만 마시다가 저렴한 와인 못 마시고, 고가의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을 ‘막이어폰’에 울리면 귀에서 거부하고, 풀HD를 보던 눈으로 VHS 대여비디오를 못 보는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남들보다 ‘더 고급스러움’을 구현한 기업은 충성스러운 소비자를 확보한다. 오디오의 출력, 자동차의 마력,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수 같은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운전이, 사진이 전하는 ‘감’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국 기업들의 행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중국의 추격에서 벗어나고 심지어 일본을 뛰어넘는 제품들이 속속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구미 선진국들처럼 극소수의 상류층 소비자를 겨냥해 초고급 상품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 먹고 사는 데에는 규모도 중요한데 최고급의 세계는 부가가치가 높은 만큼 시장도 작기 때문이다. 근래 1, 2년 사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TV에서 화사하기만 했던 과장된 색감을 버리고 표준에 가까운 자연색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고 해상도나 명암대비 같은 드러난 스펙뿐 아니라 계조, 동영상의 매끄러움 등 섬세한 부분에도 신경을 쓰고 있어 화질 면에서 일본 경쟁사들을 이미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휴대폰과 휴대형 미디어플레이어에서도 과장된 디자인, 조잡한 인터페이스, 벙벙한 음질과 조악한 번들 이어폰 등이 사라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아이팟 열풍에도 고급화로 맞상대하고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 한국 업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 사회의 소득 수준과 소비자의 눈이 높아진 결과다. 세계에서 인구대비 가장 많은 젊은이를 ‘선진국을 겪고 오도록’ 내보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것도 옳지만 고급스러운 취향과 높은 눈높이도 돈이 되고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패션뿐 아니라 전자제품, 생활용품에서도 ‘명품’을 찾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끊임없이 비판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대중 명품‘이라는 한국 제조업의 희망을 본다.

 브라이튼(영국)=박상욱 박사. 영국 서섹스대 과학기술정책연구단위(SPRU) Sangook.Park@susse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