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공감 이끌어낼 규제철학부터 만들자

전방위적 규제 선진국은 없어

 전자신문의 신인터넷 두 번째 기획은 규제다. 최근 인터넷을 둘러싼 각종 규제가 난무하고 있지만 효과가 불명확한 땜질식 규제가 대부분이다. 인터넷 규제는 필요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높이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규제는 적정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시장이나 산업, 사용자의 관점은 배제된 채 일방적인 여론규제나 정치규제가 주류를 이루면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규제의 수나 종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규제철학과 적용의 문제라는 본질적인 부분을 비껴가고 있는 것이 현재 규제의 문제다. 지금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인터넷 산업만 죽이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전자신문은 해외 4개국 취재와 국내 규제 연구 및 취재를 통해 인터넷 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지난달 8일 인터넷 게시판에 범행을 예고하고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행인 7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이 무려 범행전 20일 동안이나 휴대폰을 이용해 3000건의 범행 가능성 게시글을 올렸기에 더욱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요미우리, 마이니치신문 등에는 일제히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정부를 질타한 기사와 사설이 쏟아졌다. 누구도 범행을 예고한 글이 게시된 인터넷 공간을 탓하거나 사전 모니터링을 하지 않은 인터넷 기업에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길에서 만난 일반 회사원 미즈노(31)조차 “범죄는 범죄일 뿐 인터넷 공간과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냐”며 “현실적으로 서비스 기업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98년 드러지리포트에는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보좌관인 신디 블루멘탈이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한다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 아메리카온라인(AOL)은 이 뉴스를 사이트에 게재했고 블루멘탈은 AOL이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AOL이 단순히 글만 유통했기 때문에 미국의 통신품위법상 면책 대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판결은 이후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정보를 매개하는 인터넷사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선례로 적용되고 있다.

 지난해 5월 사르코지에게 승리의 선물을 안겨준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당시 프랑스 티셔츠 전문 인터넷 쇼핑몰인 컴부티크(www.comboutique.com)는 대선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사르코지, 루아얄 등 대선 주자의 얼굴이 담긴 만화 티셔츠 9종을 판매했다. 온라인으로 이 티셔츠를 판매하는 데 그 어떤 걸림돌도 없었으며 컴부티크는 대선 특수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본지가 최근 신인터넷 기획의 일환으로 미국·일본·영국·프랑스 4개국을 현지 취재한 결과 게시물이나 콘텐츠, 네티즌의 문제시되는 활동 등을 이유로 인터넷 공간 자체나 서비스 기업을 전방위적으로 규제하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툭하면 인터넷에 책임을 돌리고 서비스 기업을 문제삼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지난해 말 대선 때 모 마켓플레이스 운영자는 특수는 고사하고 특정 후보의 이니셜과 같은 글씨가 새겨진 가상의 티셔츠를 올렸다는 이유로 선관위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물론 국가별로 이미 사회적 가치가 확실해진 나치 문제, 아동 학대 포르노물, 인종 차별 등의 몇개 사안에는 엄격하게 내용 규제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행위자를 규제할 뿐이다. 인터넷 기업에는 고의로 방조하거나 악의적인 부분이 없다면 대부분 면책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96년 제정된 미국의 통신품위법(CDA)이나 2001년 개정된 독일의 온라인서비스법(TDG) 등은 인터넷 기업 규제를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칫 시장과 산업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총무성 야나기시마 사토루 인터넷기반기획실장은 “인터넷 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있지만 규제에 의해 표현이 위축되거나 서비스가 활기를 잃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며 “사회적으로 푸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터넷 단체 대표기구인 CCIA 애드 블랙 회장은 “미국에서는 온라인 서비스 기업이 유통 콘텐츠에 최소한의 의무를 가질 뿐 사전에 져야 할 책임은 없다”며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검열이나 다름없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런던 소재 인터넷 기업인 시트웨이브닷컴 조 코헨 CEO는 “기업을 하면서 정부 규제를 의식해 본적이 없다”며 “영국 정부는 인터넷 상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야기한 개인에게 명확한 책임을 부과한다”고 귀띔했다.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나 인터넷 시장 환경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규제의 본질적인 차이는 인터넷을 향한 기본 시각과 철학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정통망법, 저작권법 등 7∼8개의 인터넷 규제법이 있고 공정거래법, 행정법, 민법 등 기업 관련 규제까지 감안하면 인터넷 규제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올해 들어서만 10건에 가까운 새 규제법안 발의와 정부의 관련법 강화 개정 움직임이 일면서 중복 규제, 과잉 규제라는 지적을 낳고 있다.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불법 콘텐츠 문제는 현재 저작권법과 가처분 명령, 긴급명령 등으로 충분히 규제가 가능한데도 굳이 새로운 법을 입법화해 과도한 규제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에 대한 종합적인 관점이 없다 보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 규를가 만들고 가장 손쉬운 기업 규제로만 해결을 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권헌영 광운대 교수는 “현재 인터넷 규제의 문제는 행위나 콘텐츠 자체보다는 서비스 기업에 과도한 책임을 떠넘기는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합리적인 규제철학을 만들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황성기 한양대 법대 교수는 “우리나라 인터넷 규제의 맹점은 공론화를 위한 토론 과정 등 담론시스템이 결여된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정책을) 만들다보니 철학이 빈곤하다는 것”이라며 “인터넷이 위축되지 않고 문화와 산업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규제철학이 나와야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