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중국인의 `뚝심`, 실리콘밸리도 `꿀꺽`

마랩 등 중국계 IT기업 특유의 `헌신 문화`로 `성공신화`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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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정보기술(IT) 유통 전문업체 ‘마랩’의 물류창고. 제품을 나르고, 포장하는 손길이 분주한 가운데 업무를 지시하는 여성 관리자의 목소리가 창고 전체를 울렸다. 그런데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다. 돌아보니 직원들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계다. 중국어 특유의 ‘4성’이 창고를 떠다녔다. 여기가 미국인지 중국이나 대만, 홍콩의 어디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미국 IT산업의 본산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구글, 오라클 같은 미국을 대표하는 IT기업이 즐비하지만 유럽, 일본, 인도, 중국계 최고경영자(CEO)가 세운 ‘이방인’ 기업이 적지 않다.

 이 중에서도 중국계 기업은 그들 나름의 독특한 기업문화로 실리콘밸리의 한 축을 차지했다. 이들은 미국 기업에 비해 부족한 자금과 기술력을 동양 특유의 ‘헌신’으로 상쇄하며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신화를 꿈꾸고 있다.

 새너제이에 위치한 또 다른 IT기업 ‘슈퍼마이크로’도 그들 중 하나다. 대만 출신 찰스 리앙 회장이 지난 1993년 단신으로 설립한 슈퍼마이크로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독특한 전략으로 IBM, HP 등 공룡 기업의 공세를 견뎌내며 성장했다.

 슈퍼마이크로 역시 CEO뿐만 아니라 직원 80%가량이 중국 본토 또는 대만 출신이다. 그렇다 보니 회사 분위기가 주변의 다른 실리콘밸리 기업과 판이하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 이상의 희생에는 인색한 미국의 기업 문화와는 다르다.

 슈퍼마이크로 직원들은 회사를 위해 아낌없이 모든 힘을 쏟는다. 직원들은 회사를 위한 야근과 휴일근무를 자연스럽게 여긴다. 미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CEO가 직원 수백명을 소집하는 회의도 매주 네 차례나 열린다.

 타우 렝 슈퍼마이크로 제너럴매니저(GM)는 “평일에는 거의 매일 밤 늦게까지 야근하고, 주말 근무도 잦다”고 말했다.

  렝 GM은 기자와 저녁식사를 함께한 날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며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에 동료 직원과 함께 다시 회사로 향했다.

미국식 시각으로는 불합리해보이지만 이는 그들만의 생존방식이자 경쟁력이다. 찰스 리앙 슈퍼마이크로 회장은 이에 대한 설명을 ‘헌신(Dedication)’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리앙 회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헌신’이 회사의 성장동력이다. 직원뿐만 아니라 수백여 파트너사 모두 회사와 고객을 위해 성의를 다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기업 문화 덕분일까. 슈퍼마이크로는 최근 경기침체 속에서도 상승세를 유지했다. 회사는 2009 회계연도(2009년 7월∼2010년 6월)에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대하고 있다.

 앞서 방문한 마랩도 슈퍼마이크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1983년 설립된 마랩은 메모리모듈에서 CPU, 주기판, 그래픽카드 등에 이르기까지 5000여종의 IT제품을 취급하는 IT 전문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마랩도 CEO는 물론이고 직원 대부분이 중국 본토 또는 대만 출신이다. 회사명의 ‘MA’도 CEO의 성(姓)에서 따온 것이다.

 마랩도 앞서 물류창고에서처럼 여느 실리콘밸리 기업과는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마랩에 근무하는 한국계 제이 킴 씨는 “직원들 대부분이 중국계여서 사내 문화도 많이 다르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문화가 항상 기업 발전에 플러스요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국 출신 인력과 조화를 이루고 미국의 기업문화를 효과적으로 도입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슈퍼마이크로나 마랩의 직원 대부분이 중국계인 것은 이들 기업이 중국계를 선호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지 출신 인력이 이들 기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기도 하다.

 슈퍼마이크로에 근무하는 미국인 A씨는 “미국인들은 예고 없는 야근과 주말 근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회사 임금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어서 보통의 미국 현지인들은 이곳에서 근무하기를 꺼린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지만 이들 중국계 IT기업이 미국 진출을 노리는 ‘이방인’들에게 하나의 참고모델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모두가 인정하는 정답은 아니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이방인’이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 발을 내디딘 모두가 애플이나 구글처럼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모두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무작정 성공한 기업의 스타일만 흉내내다가 미국에서 돈만 날리고 주저앉은 이방인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발에 안 맞는 명품 구두를 억지로 껴 신느니, 발에 잘 맞는 운동화를 신고 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새너제이(미국)=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