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맥, 네트워크산업을 키우자] <1> TDX 이후 열정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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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제7차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만성적인 전화 적체 해소를 위해 전자교환기 개발 논의가 시작된 지 꼭 10년 만인 1986년. 우리나라는 한국형 전전자교환기 ‘TDX-1’을 상용화해 개통했다. 미국·일본·프랑스 등에 이어 세계 열 번째로 전전자교환기를 자체 개발해 운용한 국가로 발돋움한 순간이다.

 전자교환기는 반도체·컴퓨터와 함께 정부가 ‘전자산업 육성계획’의 미래 비전에 따라 선정한 산업용 전자산업의 3대 전략품목 중 하나다. 이 가운데서도 핵심이 전자교환기였다. 대규모 공장 건설 비용도 50억원에 불과했던 시절에 240억원의 정부 예산이 투입된 거대 프로젝트였다.

 당시 개발계획을 주도했던 체신부 주변에서는 물론 국회에서도 개발 가능성과 개발비 규모를 가지고 말이 많았다.

 이처럼 찬반 의견이 분분해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기통신연구소 간부들은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반드시 개발하고,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서를 체신부 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1986년 TDX-1이 개발에 성공한 뒤 이 서약서는 ‘TDX 혈서’라고 불리기도 했다. TDX 혈서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TDX 개발에는 정부와 연구원, 기업 등 참여한 모든 이들의 열정이 녹아 있다.

 이 열정의 산물인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 개발은 이후 한국 정보통신(IT) 혁명의 원동력이 됐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은 TDX 국산화를 통해 기술자립 시대를 앞당기고, 이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이동통신 등 첨단 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정보통신 혁명의 원동력이 됐던 네트워크 산업의 화려한 날은 여기서 시침이 멈췄다.

 이후에도 TDX-10을 개발, 필리핀으로 수출을 시작해 1996년에는 9개국에 3억7000만달러 규모를 수출했다. IMF 구제금융 기간 중에도 10개국에 1억8000만달러를 수출했지만 마지막 불꽃에 불과했다. 당시 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기업 중 네트워크 분야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은 삼성전자를 제외하곤 한 곳도 없다.

 삼성전자도 와이브로를 통해 선전하고 있지만, 비슷한 때 출발했던 반도체나 컴퓨터 등과 비교하면 성공을 논하기 힘들다. 또 LG도 LG-노텔을 통해 맥을 이었지만, 최근에는 에릭슨으로 파트너가 바뀌는 시련을 겪었다. 동양전자통신이나 대우통신 몰락 이후 한화정보통신 등도 그 명맥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인터넷 프로토콜(IP) 기반으로 전환되면서 네트워크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의 의미있는 흔적을 찾아보긴 더 힘들어졌다.

 전 세계 네트워크 시장 규모는 지난 2008년 1871억달러에 달한다. 시스코·에릭슨·알카텔­루슨트 등의 소수의 기업이 주도하는 가운데, 가격 경쟁력을 갖춘 중국 기업이 급성장하는 형국이다. 국내 시장 규모도 2008년 약 4조3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세계 시장 규모의 54분의 1밖에 안되는 국내 네트워크 산업계에는 약 800개 업체가 뛰고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매출 1000억원 이상의 기업은 LG-노텔·동원시스템즈·SK텔레시스·다산네트웍스·삼성전자·콤텍시스템 6개에 불과하다. 이들 기업도 대부분 내수 시장에 의존하거나 외산 제품을 국내에 유통하는 수준이다.

 국내에는 토털 솔루션을 확보한 네트워크 종합 기업이 없고, 단품장비 위주의 중소기업이 난립, 과잉 납품 경쟁이 반복되고 있다.

 기술 수준도 차세대 장비 일부 품목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다. 하지만 일본·유럽 등 선진국과의 기술차이는 1년여에 불과하다. 가장 앞선 미국과도 차이도 2.9년에 불과하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이들 선진국과의 기술을 전 분야에 걸쳐 뒤집기는 싶지 않다. 또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 화웨이·ZTE 등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산업은 국가와 산업이 존재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인프라산업다. 인터넷전화(VoIP), IPTV, u러닝 등 차세대 IT산업을 이끌 모든 융합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제공되기 위한 핵심 기반산업이다.

 국내 기업의 경쟁력과 특성에 맞는 선택과 집중에 따라 네트워크산업 육성이 중요하게 요구되는 이유다.

 오픈네트워크얼라이언스(ONA) 의장을 맡고 있는 박진우 고려대 교수(전자공학과)는 “네트워크산업은 지금까지는 통신산업의 기반이었지만, 앞으로는 융합산업의 기초이자, 경쟁력 기반이 될 것”이라며 “이 분야의 자체 경쟁력 없이는, 지능형 네트워크사회를 떠받치는 모든 산업에서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팀=이진호 팀장(차장), 홍기범, 이경민기자 jholee@etnews.co.kr

 ◇ ‘IT강국 코리아= 테스트베드’ 전락

 1995년부터 강력하게 추진돼온 초고속인터넷 인프라 구축 및 확대 전략은 한국을 가장 빠른 시간에 세계적인 IT강국으로 일으켜 세웠다. 인터넷은 미국에서 나왔지만, 인터넷을 가장 많은 국민이, 가장 넓은 계층에서, 가장 빠르게 이용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밖에 드러난 외형상 모습일 뿐 내용은 거꾸로 흘렀다.

 우리나라는 TDX와 CDMA 개발에 잇따라 성공했지만, 그 이후 IP시대를 주도할 네트워크 연구개발(R&D)은 팽개쳤다. IT강국의 수치적 급성장에 잔뜩 도취돼서다. TDX와 CDMA 등을 해외에 팔아 적잖은 돈을 벌었지만, 그것은 10여년간 모두 모아도 1년치 전 세계 네트워크 시장 규모에 맞먹을 정도밖에 안 된다.

 정부, 민간의 R&D 동력이 떨어지다 보니, R&D 집약성이 강한 산업특성상 외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초고속인터넷, 광가입자망이 아무리 많이 깔리고 유무선 이용자들의 데이터 이용량이 아무리 늘지라도 우리 네트워크 산업의 수입이나 성과로 남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하는 셈이다.

 고가 장비인 코어 라우터의 경우, 단 2개의 외국기업이 세계 시장의 93%를 점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를 외견상 IT강국이지만, 외국에서 개발한 네트워크 장비가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는지, 일정 속도와 데이터 용량에도 안정적으로 기능하는지를 시험하는 일종의 테스트베드가 돼 버린 상황이다.

 국산 네트워크 장비는 열악한 R&D에서 출발해, 수익성 없는 내수시장, 비정상적인 납품 구조 등을 견디다 보니 브랜드와 호환성, AS 보장면에서 외국 제품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R&D 취약→핵심 기술 및 제품 성능 약화→매출 및 수익부진→장기적 R&D 부진→전체 산업약화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 완전히 버릴 ‘레드오션’ 아니다

 

 ‘네트워크는 진화한다.’

 지금까지 전화·인터넷·이동통신으로 진화해 온 네트워크 속도가 수십배, 수백배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IPTV, u시티, 클라우드컴퓨팅서비스, 지능형 홈네트워크, 스마트그리드 등 새로운 서비스와 녹생성장도 지능화된 네트워크 장비의 도움 없이는 형성은 물론이고 발전이 어렵다.

 2004년 이후 세계 시장 성장률과 전통적 IT산업의 성장률은 동반 둔화됐으나, 네트워크 관련 주요 기업들은 견조한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전 세계적인 수요가 동시 침체되면서 성장세가 마이너스 5.3%로 꺾이긴 했으나, 향후 광가입자장비, 유무선 통합 장비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기준의 세계 점유율이 취약하다고 해서, 선진국 대비 기술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인 것이다.

 오히려 지금 포기하는 것은 ‘미래의 황금시장’을 놓치는 격이다.

 국내 인프라 고도화는 물론이고 해외시장 IT 플랜트는 우리 기업들에 아주 중요한 기회다. 지금부터라도 IT융합과 스마트그리드 등 새로운 분야의 기술 개발과 확보가 중요한 이유다.

 경쟁력은 사람·기술·시장에서 만들어진다. 네트워크산업은 구조상 사람과 기술 없이는 승부를 걸 수 없다. 이 시장을 포기해선 미래 기술 확보와 산업 경쟁력 토대를 확보할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이 특단의 의지를 갖고 새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가트너 조사에 따르면, 내년 IPTV, 지능형 홈네트워크, 광가입자망 등 차세대 장비로의 전 세계 교체 수요가 평년의 무려 73%에 달할 전망이다. 이 기회를 잡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