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한국 팹리스 왜 못 크나… 시장 넓히고, 제반 여건도 개선해야

한국 팹리스 반도체 산업이 붕괴 위기다. 한때 코스닥 유망주에서 상장 폐지까지 내몰린 이유는 복합적이다.

조그만 내수 시장에서 삼성이나 LG 생태계에 묶여 있던 탓이 가장 큰 원인이다. A사는 삼성, B사는 LG에만 각각 공급하는 식이다. 한 팹리스 업계 인사는 “묶인 몸을 풀려면 고객사가 쓰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만한 선행 제품이나 혁신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팹리스를 제외하면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국과 비교되는 중국 팹리스 업계의 환경은 다르다.

이병인 한중 시스템IC 협력연구원장은 “중국은 시장이 커서 다자 간 거래가 일상화돼 있다”면서 “복수 공급사, 복수 고객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팹리스가 대기업에 완전히 종속되면 딱 먹고살 만큼만 수익을 낸다. 사업,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가 쉽지 않다. 이 상태에서 기술 트렌드와 시장이 변하면 실적이 고꾸라지고, 심지어 문을 닫기도 한다.

조중휘 인천대 교수는 “해외 고객사 비중을 늘리고 자금을 축적해 인수합병(M&A)이든 연구개발(R&D)이든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팹리스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몇몇 업체는 국내보다 해외 고객사 비중이 오히려 높다. M&A에도 적극성을 보인다. 조 교수는 “이런 회사가 미래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할 수 있다”면서 “다양한 고객사의 요구를 듣고 시장 변화를 빨리 알아채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는 삼성과 LG에 제품을 공급하는 수준이라면 해외 진출은 단순히 기술 혹은 의지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제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쓸 만한 파운드리가 없다”는 것이 팹리스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만 TSMC, UMC나 중국 SMIC가 아닌 국내에서 칩을 양산할 수 있다면 사업 운용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유일의 오픈 파운드리 회사인 동부하이텍을 해외 업체에 매각해선 안 된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왔다. 삼성전자가 최근 오픈 파운드리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 간 협업 경계선도 확실히 긋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잘나가던 팹리스 업체가 하나둘 몰락하면서 디자인하우스가 직접 칩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렇다 보니 팹리스는 디자인하우스에 일을 맡기기가 어렵다. ‘우리 설계를 보고 베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이재만 하나텍 사장은 “연매출 수백억원 규모의 작은 팹리스도 디자인하우스 인력을 보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면서 “이처럼 고정비가 높으면 이익 규모가 줄고 역량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정부 지원은 지속되고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올해 반도체 분야에선 신규 R&D 예산이 없다. 개별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R&D 예산이 없어진 것을 두고 환영의 목소리도 나온다. 망해 가는 기업은 망하게 둬야지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서 좀비 기업을 양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려되는 문제는 인력 수급이다. 정부 예산이 없으면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들의 월급을 못 준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이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아예 다른 분야로 떠나는 이도 많다.

이서규 픽셀플러스 사장은 “지난해 한국에서 배출된 석·박사급 반도체 설계 인력은 200명밖에 안 된다”면서 “올해는 정부 지원이 끊어져서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설계 인력이 곧 경쟁력인 팹리스 업계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병인 원장은 “중국 정부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는 우수 인재에게 주택과 교육을 지원할 만큼 적극적이다”면서 “이공계와 인문계 연봉 격차는 3배 이상으로 이공계 우대 풍토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인재 양성과 반도체 설계 분야 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