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유 전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현 서울대 공대 교수)은 융합형 학자다. 공대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 자원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뒤늦게 역사학을 공부했다. 학문의 벽을 넘나든 학자다. 국가 발전 원리를 체계화해서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인터넷 국민추천제로 초대 청와대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으로 발탁돼 1년여 동안 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에게 한 첫 말이 “김 보좌관, 앞으로 계급장 떼고 토론해 봅시다”였다.
재임 시 국정 과제인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위해 과기 부총리제 신설, 이공계 공직 특채 같은 굵직굵직한 정책을 도입했다.
공직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 그는 집과 연구실만 오갔다. 8년 동안 역사학을 공부하며 산업혁명사 연구에 전념했다. 세계를 이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패권국의 비밀을 역사학 기반으로 분석했다. 집필에만 5년이 걸렸다. 최근 출간한 '패권의 비밀'이다. 지향점은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이었다. 김 전 보좌관을 21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2006년 1월부터 주말에도 도시락 싸 들고 학교로 출근했다. 산업혁명사를 쓰려면 다양한 학문이 필요하다. 축구 선수도 달리기, 체력,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젊은 역사학자 4명을 사사했다. 논문과 책을 읽고 일주일에 3시간 집중토론을 했다. 대학 총장과 정부 산하 기관장직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몇 개 바꿨다. 허리 디스크가 발병해 지금도 통증이 심하다. 동창이니 친구 모임에도 안 나갔더니 '해외로 나갔다'거나 '불치병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등 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패권의 비밀'을 집필한 이유는.
▲부끄럽고 슬픈 약소국의 역사가 싫었다. 지난날의 영화는 지금과 아무 관련이 없다.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지금 어떻게 됐나. 우리도 세계 패권의 비밀을 알아야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이 책을 쓴 이유다.
-패권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학자마다 사관에 차이가 있다. 분명한 건 산업혁명을 한 나라는 패권국이 됐다. 패권국은 지배자다. '패권의 비밀'은 누가 먼저 산업혁명을 했느냐다. 안 한 국가는 식민지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같은 패권국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국가 정책이 산업혁명을 만들었다. 미국은 철저한 보호무역으로 근대산업사회로 발전했다. 영국도 산업혁명을 정책이 주도했다. 인도에서 캘리코라는 값싸고 품질 좋은 면직물이 들어오자 영국 모직 산업은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1721년 캘리코 수입과 착용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에 기계화 모직물 산업이 태동,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산업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한국이 패권국이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덜란드는 면적이 한반도의 5분의 1이지만 산업혁명으로 세계 패권국이 됐다. 우리도 4차 산업혁명으로 패권국이라는 영화를 누릴 수 있다. 패권에는 독점패권과 과점패권이 있다. 노력하면 독점을 못해도 과점은 할 수 있다. 1853년 미국의 매슈 갤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바쿠후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장하며 메이지유신을 했다.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를 격퇴한 뒤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워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폈다. 서양의 충격을 두 나라가 모두 받았지만 일본은 산업혁명을 했고 우리는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낳았나.
-한국은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로봇 같은 첨단 과학기술과 4차 산업혁명을 동일시하는데 그건 아니다. 홍길동이 남자지만 모든 남자가 홍길동은 아니지 않은가. 특정 분야만 육성하는 것은 과거 방식이다. 2003년 12월 당시 황우석 박사 연구실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간 게 나다. 당시 황 박사에게 연구비를 몰아주자는 여론이 많았다. 나는 반대했다. 야구 경기에서 선수 한 사람만 집중 양성한다고 팀이 우승하는 게 아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1차 산업혁명은 석탄·금속·직물 혁명이다. 2차는 화학·전기·강철 혁명이다. 산업 사회에서는 철강, 에너지, 화학, 전기 같은 기간 산업이 필요했다. 3차는 정보통신기술(ICT)과 신재생에너지 기술이 중심이었다. 4차 산업혁명은 융·복합 기술로 범위가 넓고 다양해 기간 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북극성 시대라면 지금은 은하수 시대다. 은하수 시대에 AI나 빅데이터, 로봇 같은 특정 분야만 집중 지원한다고 4차 산업혁명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성공을 위해서는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정부 혁신이다. 공직 사회 유전자를 혁신시켜야 한다. 이제 퍼스트무버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러자면 관료를 전문가로 바꿔야 한다. 요즘 규제 개혁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전문가가 없어서 그렇다. 전문가는 뭐가 불필요한 규제이고 강화해야 할 규제인지 잘 안다. 둘째는 은퇴가 없는 2모작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젊은 인재를 4차 산업혁명 전사로 길러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피부과 성형의를 선호한다. 앞으로 의료 분야의 80%를 AI가 담당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에서 대승했다. 당시 전투는 남자, 병참은 여자가 각각 담당했다. 2모작 사회에서 일반 행정은 사회 경험이 있는 은퇴자나 경력 여성에게 맡기면 된다. 셋째는 북방 경제 선점이다. 우리가 북극항로를 개척,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야 한다.
-대학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한때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했다. 지금은 외형으로 해소됐다. 내실 문제는 남아 있다. 유능한 인재가 피부과 의사를 하면 혼자 잘 먹고 잘산다. 그 인재가 스마트 칩을 개발하면 수십만명이 혜택을 본다. 국가 유인책이 필요하다.
-미래는 어떤 자세로 준비해야 하는가.
▲인류 문명은 맬서스형 비관론과 유토피아형 낙관론이 정반합으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비관론자는 양심형, 낙관론자는 진취형이었다. 인류문명사의 주역은 유토피아형 낙관론자다. 몽골은 기마술로 세계를 지배했다. 우리도 유토피아형 낙관론자가 돼야 한다.
-청와대 보좌관으로는 어떻게 발탁됐나.
▲노 대통령이나 정치권 인사와는 일면식도 없었다.(그는 인터넷 국민추천제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첫 만남에서 노 대통령이 “김 보좌관, 계급장 떼고 토론합시다”라고 하셨다. 열린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과 함께 정책을 놓고 격의없이 토론했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 2009년 1월 '정부 유전자를 바꿔라'는 책을 낸 뒤 노 대통령에게 연락했더니 “좀 천천히 토론하자”고 하셨다. 얼마 후 노 대통령이 서거했다. 영전(影殿)에 책을 놓고 왔다.
-청와대 과기보좌관 생활 가운데 있은 보람된 일과 아쉬운 점은.
▲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위해 과기부총리와 과학기술혁신본부 설립, 이공계 박사 사무관 특채, 개방형 임용 확대, 신성장 동력 산업 지정과 육성 등을 추진한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미시경제를 과기부총리가 맡고 연구개발(R&D)비는 과기혁신본부로 넘겼다. 공직자들에게 공적 1호가 됐다. 음해성 투서도 많았다. 이런 건 대통령과 독대해서 해소했다. 2003년 하반기에 정부혁신안을 마련, 노 대통령께 독대를 요청했다. 일요일 아침 관저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날 오전 9시부터 3시간여 동안 정부혁신안을 보고했다. 노 대통령이 다 듣더니 “김 보좌관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며칠간 잠을 못 잤다. 율곡전서(栗谷全書)에서 율곡은 “정암(조광조)은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바꾸고자 해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내 학문이 모자란 결과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공부를 한 이유다.
-앞으로 계획은.
▲'패권의 비밀' 속편으로 한국과 일본, 독일, 대만 등 중진국 산업사를 발간하려고 한다. 유럽학자를 포함한 7명이 11월 독일에서 3박 4일 동안 집중 토론을 했다. 새해 가을에 서울에서 만나 초안을 만들고 2020년 가을께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와 별도로 '진로방해(進路妨害)'라는 책도 준비하고 있다. 목차는 다 정했다. 패권국이 후발국 발전을 어떻게 방해했는가를 고찰한 책이다. 학자는 정책 이론을 구상한다. 명검을 만드는 도공(刀工)과 같다. 그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검투사(劍鬪士)다. 관료나 정치인이다.
-청년들에게 당부할 말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4000여명에 이른다. 교통사고가 무서워서 자동차를 없앨 수가 있는가. 미국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때 감전사를 우려해 반대했다. 영국에서는 기계파괴(러다이트)운동도 있었다. 청년들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좌우명과 취미는.
▲좌우명은 '책임지는 사람이 되자'다. 취미라면 책읽기다. 바둑, 당구, 등산 모임에도 가봤는데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김태유 전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경제학 석사, 콜로라도 스쿨오브마인스에서 자원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 박사후과정을 거쳐 아이오나대 경영시스템학과 교수를 지낸 뒤 1987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대 대통령 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일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한국자원경제학회장, 한국혁신학회장, 외교통상부 에너지·자원 대외직명대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가에너지위원, 인사혁신추진위원, 북방경제협력위원이다. 서울대 공대 훌륭한 교수상, 한국공학한림원 기술정책상, 과학기술훈장 혁신장을 받았다. 저서로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국부의 조건' '은퇴가 없는 나라' '경제성장론'(영문판) 등이 있다. 역서로 '황금의 샘 Ⅰ·Ⅱ' '자원의 지배' 등이 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