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고지신]변하지 않는 세상의 기준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물리표준본부 책임연구원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물리표준본부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인지 설전을 벌인 적 있다. 제트기가 빠르다거나 로켓이 더 빠르다거나 각자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기가 옳다고 우겼다. 결국 선생님께 여쭤 보았다.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고,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빛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빛이 가진 '일정한' 속도가 궁금했다.

빛은 진공 상태에서 초당 2억9979만2458m를 간다. 빛은 m 단위를 설명하는 데 쓰인다.

과거 1m는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 거리를 1000만분의 1로 나눈 길이로 정했었다. 18세기 프랑스 과학자들은 m를 결정하기 위해 측량 작업을 벌였고, 길이에 해당하는 잣대를 만들었다. 당시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백금과 이리듐 합금이 재료였다. 1㎏의 분동도 만들었다. 국제 m원기와 ㎏원기라는 이름으로 1889년부터 세상에서 길이와 질량의 기준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 잣대와 분동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준이 변하면 측정값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를 이용해 m를 다시 정의했다.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과 맥스웰이 이론으로 증명했다. 그 후 많은 과학자들이 그 속도 값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고, 1975년에 현재와 같은 숫자로 고정됐다.

이전에는 금속 잣대로부터 미터가 정해졌지만 1983년부터는 빛의 속도에서 미터가 정해졌다. 정의가 달라졌다고 미터라는 길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근본이 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 미터 단위를 더 정확하고 안정되게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의 속도는 '기본상수' 가운데 하나다. 기본상수란 상대성 이론과 같은 자연의 법칙에서 나오는 불변의 숫자다. 역사적으로 자연에서 법칙을 찾은 위대한 과학자 이름이 여러 기본상수에 붙어 있다. 플랑크 상수, 볼츠만 상수, 아보가드로 상수 등도 그렇다.

그런데 옛날에 만들었던 ㎏원기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표준저울은 질량의 기준을 제공하는 이 원기에 중력이 작용해 작동하는데 현재 변하는 원기 대신에 불변의 플랑크 상수를 이용해 ㎏ 단위를 다시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를 위해 개발된 장치를 키블저울이라고 부른다.

키블저울은 1976년에 이것을 발명한 영국 과학자의 이름을 땄다. 중력이 아니라 전자기력으로 동작한다. 플랑크 상수로부터 ㎏을 정의하려면 먼저 이 상수 값이 빛의 속도처럼 아무 불확실함 없이 고정돼야 한다. 이를 위해 키블 저울을 개선하는 연구가 선진국에서 20년 이상 이어졌고, 작년에서야 충분히 정확하고 신뢰성 있게 동작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를 통해 ㎏ 단위를 재정의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앞으로 국제도량형총회의 최종 확정을 통해 재정의 작업이 마무리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 가을이면 프랑스 파리에서 ㎏ 외에도 3개 단위가 각각의 기본상수에 의해 다시 정의된다.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 열역학적 온도의 단위인 켈빈, 물질량의 단위인 몰이다. 이 새 기준은 세계 측정의 날인 2019년 5월 20일부터 세계적으로 시행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m단위 재정의 때와 마찬가지로 ㎏단위의 정의가 바뀌더라도 산업과 일상생활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단위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정확하고 변하지 않는 측정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이 일의 제일 중요한 목표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물리표준본부 책임연구원 hslee@kriss.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