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소재 국산화를 위한 제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벤처인 A사는 디스플레이 대기업에서 투자를 받았다. 척박한 국내 OLED 소재 분야에서, 그것도 일본에 의존해야 했던 청색 재료 분야에서 남다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자에도 불구하고 대기업과의 개발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A사를 발굴하고 투자를 추진했던 부서와 달리 실제 소재를 구매해 사용하는 쪽에서는 필요성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 소재로도 충분한 데,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개발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A사 관계자는 “좋은 성과로 투자에 보답하고 회사도 성장하는 기회가 되길 바랐는데 뜻처럼 되지 않았다”며 “차라리 투자금을 돌려주고 중국 등 다른 곳과 협력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규제와 백색국가 배제 조치로 소재 국산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 계기로 삼아 일본에 종속된 산업 구조를 탈피하고, 국내 생태계를 육성하자는 것이다.

산업계 기류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진 게 느껴진다. “수요처에서 먼저 샘플을 요청한다”거나 “국산 소재부품을 꼭 테스트 한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대처한다면 그야말로 국내 산업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낙관만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소재 개발이 하루아침에 쉽게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업계에 구축된 공급망(SCM)은 각 주체들이 오랫동안 연구개발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나온 것이다. 기술, 노하우, 가격 등 모든 측면에서 쌓인 축적의 결과물이기에 현 체계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정부는 3개 소재 수출규제 외에도 안보 우방국을 뜻하는 '백색국가'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해 또 다른 부품소재 수출을 어렵게 했다. 앞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가 풀리고, 갈등이 해소된다 해도 두 번 다시 휘둘리지 않으려면 국산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자료: 삼성전자)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자료: 삼성전자)

성공적인 소재 국산화를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너를 포함한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와 의사결정이 우선돼야 한다.

실무선에서 국산화를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변화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다. 실패를 인정하기보다 책임을 묻기 바쁜 게 아직 변치 않은 국내 기업 문화에서 시키지 않은 일에 먼저 손들고 나설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너나 최고경영자의 지시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순간부터 책임질 일이 아닌 성과가 돼서다.

또 좋은 품질에 가격까지 저렴한 제품이 개발돼도 A사 사례처럼 각 부서 사정이 달라서 혹은 사내 정치적인 이유로 벽이 막히는 현실의 벽도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있어야 풀 수 있다. 경쟁에서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국내 기업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소재 국산화도, 일본 소재 기술을 따라 잡는 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일본 소재 기술이 뛰어나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되는 게 있다. 고품질의 첨단 소재를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요 기업, 즉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곳의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공정에 새로운 소재를 적용해보고 보다 나은 결과를 도출하려는 실험이 없었다면 첨단 소재는 나올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업계가 쌓아온 신뢰와 분업 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제 국내 소재에도 협력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공동의 노력이 절실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국내 산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인이 국산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실행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오른쪽)이 투명 OLED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자료: LG그룹)
구광모 LG그룹 회장(오른쪽)이 투명 OLED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자료: LG그룹)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