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상표권 사재기

[과학산책]상표권 사재기

지금부터 20여년 전 국내에 인터넷이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도메인네임 '사재기'가 유행했다. 수억원의 이익을 챙긴 사례가 기사화됐다. 타인의 권리를 부정한 방법으로 선점한 사람이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다. 이제는 도메인네임 보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 결과로 도메인네임 사재기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런 사례가 최근 다른 분야에서 다시 재연되고 있다. 상표권 사재기다. 상표를 사용 의사와 관계없이 장래에 되팔거나 부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출원하는 행위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상표권 사재기가 돈이 되는 '비즈니스'로 인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상표 출원을 대행해 준다는 인터넷 전문회사가 저가 공세로 현 상황을 더 부추기고 있다. 얼마 전 구속된 무자격 상표 출원 대행업자가 3년 동안 1만2400여건의 상표 출원을 불법 대리했다니 그 가운데 진정으로 사용을 염두에 두고 출원된 상표가 몇 건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상표권 사재기를 방치하면 모두에게 사용이 허용돼야 할 기호나 문자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재기 업자에게 상표를 사든지 사용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용할 수 없다. 사재기 업자는 당연히 사용은 안중에도 없다.

상표로 사용될 수 있는 좋은 기호와 문자가 사재기 업자의 영리추구 행위를 위한 인질이 되는 셈이다. 이는 시장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타인의 정당한 영업 행위를 방해해 시장에서의 경쟁을 해쳐서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을 바람직하지 않은 지대 추구 행태로 유도한다. 또 사용하지 않을 상표라 하더라도 일단 출원되면 사용 상표와 똑같은 시간 및 노력으로 심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국가 행정력 낭비도 초래한다.

상표권 사재기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허청은 상표 심사를 좀 더 철저히 해야 한다. 특허청은 심사관 의심이 나는 경우 출원인의 상표 사용 의사를 확인토록 하는 상표 사용 의사 확인 제도를 2012년부터 도입, 시행하고 있다. 시행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상표권 사재기로 의심되는 경우에는 더욱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

상표 출원을 대리하는 변리사도 국내 출원인이 많은 상표를 출원하도록 독려하기보다 향후 국내외에서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출원인의 영업 행위와 관련해 최소 필요한 상표를 신중하게 선별해야 한다. 국내외에서 상표가 충분히 보호될 수 있도록 상표 구성과 지정상품 지정 서비스의 범위를 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상표 사용자도 저가 공세에 현혹돼 사용하지도 않을 많은 상표를 출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영업 계획과 연계해 자신이 꼭 필요한 상표를 선별해서 출원해야 한다. 비용 지출을 줄이고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강력한 상표를 확보하도록 투자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실제 소송에서는 특허보다도 상표가 침해 기업의 영업 행위에 절대 영향력을 미쳐서 손해 배상액도 고가인 경우가 많다. 상표는 특허처럼 회피 설계 자체가 불가능해 침해로 판정된 경우 상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상표는 하찮은 것이고, 대충 출원하고 관리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향후 기업 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사용하지 않는 좋은 상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상표는 사용해야 비로소 가치가 발현된다. 상표권 사재기는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임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사재기의 표적이 된 상표는 시장에서 실제 사용되지 않으며,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국가 경제 차원에서도 큰 손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참신한 우리말 상표가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준석 특허법인 위더피플 대표변리사 leejs@wethepeop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