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3>넬슨 만델라 (상)신화가 된 말썽꾸러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이항개념으로 가득했다. 백인과 흑인, 지배와 피지배,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법이었다. 백인 기득권이 '비백인을 사회로부터 완전하게 분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세력은 흑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3>넬슨 만델라 (상)신화가 된 말썽꾸러기

1918년 코사코 부족장 아들로 태어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어릴 적 이름은 '롤리흘라흘라(Rolihlahla)'였다. 말썽꾸러기란 뜻이다. 롤리흘라흘라가 학교에 간 첫날 선생님은 그에게 넬슨(Nelson)이란 영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물세살, 부족에서는 같이 살 여자를 정해주었다. 만델라는 정략결혼을 피해 요하네스버그로 달아났다. 도시로 간 만델라는 화장실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백인 전용화장실을 이용한 죄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 80%, 백인과 유색인 20%로 구성된 나라다. 10% 백인이 300여년 동안 비백인(Non-White)을 지배했다. 1948년 집권한 국민당은 흑인을 확실하게 지배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법안을 만들었다. 1949년엔 타 인종 간 연애와 결혼을 금지하는 '통혼금지법'이 등장했다. 이듬해 인종에 따라 주민을 분류한 '인구등록법'이, 거주 지역을 인종별로 설정하는 '집단지역법'이 발효됐다. 1953년 공공장소까지 인종별로 분리하는 '공공장소 분리법'까지 만들어졌다. '반투(Bantu:흑인 아프리카인) 교육법'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인권착취의 결정체였다.

만델라는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합류해 청년 동맹을 결성하며 반인권법에 맞선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샤프빌 학살'을 계기로 그는 지하군사운동단체 '민족의 창(MK)'을 조직했다. 반인권법에 폭력시위로, 무장투쟁으로 맞섰다. 비폭력주의가 원칙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평화시위 운동 중단을 선언했다. 만델라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카다피,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식 폭력 투쟁방식을 공부했다.

1964년, 국가 반란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남아공의 '알카트라즈'라 불리는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의 나이 46, 466번째 수감자였다. 죄수번호 46466인 만델라는 수감 중에 자와할랄 네루상(1979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년), 유네스코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1983년)을 받았다.

국민은 만델라 석방을 외쳤다. 흑인들에게 만델라는 박해의 상징이자 해방의 상징이었다. 피터 윌렘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조건부 석방을 제안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폭력을 계획하거나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만델라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가 먼저다. 우리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면 어떤 조건도 받지 않겠다. 국민의 자유와 나의 자유는 분리될 수 없다.”

만델라는 만 26년의 감옥살이를 끝으로 1990년 석방됐다. 석방된 다음 해,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이 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나섰다. 1993년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남아공 정부는 모든 인종이 참가하는 총선거를 실시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스 문화기호학자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는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나 사건 등에 내포된 의미를 신화로 지칭했다. 바르트는 현대 신화에 담긴 이미지는 어떤 식으로든 신화 생산자의 의도와 이데올로기를 담는다고 했다. 신화는 이미지를 미화하고 이상화하는 방법으로 생성되며 수용자에게 상징 메시지가 된다. 말썽꾸러기 투사에서 인도주의 성자가 된 만델라 신화, 투쟁 이데올로기일까, 평화의 상징일까.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3>넬슨 만델라 (상)신화가 된 말썽꾸러기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