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소부장'이 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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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동안 우리나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이 겪은 환경 변화는 '미증유'의 사태였다. 말 그대로 한 번도 가지 않은 밤길을 더듬어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조치는 핵심 소재를 소수의 해외 공급처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핵심 소부장 국산화와 함께 공급처 다변화가 산업계 화두로 등장한 배경이다. 다행히 정부와 업계가 힘을 합쳐 수급 위기에 빠르게 대처, 큰 위기는 넘어가는 모습이다. 발 빠르고 위기에 강한 우리 산업계의 DNA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최근에는 일본 언론에서조차 한국의 소재 국산화 및 다변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면서 일본 기업이 역풍을 맞고 있다는 분석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 체면에 휘둘린 승자 없는 싸움'이라는 탄식까지 나온다. 양국 간의 전향적인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 등이 진행되고 있어서 수출규제 문제 해결은 아직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소부장 산업계가 가야 할 길도 아직 멀다. 소부장 산업 혁신 노력을 이어 가 산업 구조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면밀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단기적으로는 대외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핵심 품목의 공급망 집중도를 완화하고, 전략적인 국내 생산·공급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인됐듯이 글로벌밸류체인(GV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 산업 구조 상 다양한 유형의 불확실성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체계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중기적으로는 미래 첨단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소부장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연구개발(R&D) 체계를 미래형 및 선도형 산업 구조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개편하자.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협력 관계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 대기업이 먼저 변해야 한다. 보여주기 식이나 소나기만 피해 가자는 식의 안일한 현장 대응은 산업 생태계를 이전으로 되돌릴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GVC 변화에 선제 대응하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공급망은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벗어나 국가 및 권역별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 공급망 재편을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글로벌 R&D 허브로 도약해야 한다. 경기도 용인에 구축되고 있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모범 사례로 만들자.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기술을 선도하는 우리나라의 기술 역량은 소부장 R&D 클러스터 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미 많은 글로벌 소부장 기업이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의 혁신 역량을 국내 소부장 산업 생태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갈 수 있도록 하자. 인력 양성과 함께 국내 소부장 기업들의 역량을 글로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확보한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줘야 한다.

조만간 정부의 '소부장 2.0' 대책이 나올 예정이다. 업계의 목소리와 중장기 비전을 담은 종합 대책이 되길 기대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고 있는 소부장 업체에 등불 하나 정도는 쥐여 줘야 하지 않겠나. 이제 소부장 업체도 보폭을 조금 더 넓히자. 아직 갈 길이 멀다.

[데스크라인]'소부장'이 가야 할 길

양종석 산업에너지부 데스크 jsy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