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6>윈스턴 처칠(상) 피, 땀, 눈물 그리고 승리

“넌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 성적으로 어림없으니 꿈도 꾸지 마라. 변호사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고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나쁘고 다른 능력이 보이지 않으니 군인이나 되렴.”

37세에 재무장관을 지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아들이 영 탐탁지 않았다. 작고 뚱뚱한 체격, 불독 닮은 얼굴에 말더듬이, 우울증까지 겹쳤다. 아버지는 그가 세상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6>윈스턴 처칠(상) 피, 땀, 눈물 그리고 승리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결단과 지도력으로 버텼다. 그는 당시 히틀러 나치에 맞선 최후의 지도자였다. 절체절명 순간에 그가 국민에게 던진 메시지는 현실 직시였다.

“우리는 다음주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인류의 생명, 문명, 미래에 대해 더 큰 규모로, 더 치명적인 결과를 몰고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상기하고 분발합시다. 앞으로 영연방이 1000년간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지금 이때야말로 가장 좋은 시절(The Finest Hour)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전 유럽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던 히틀러가 처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국은 1939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독일과 협상을 벌여 전면전만은 피하자는 것이 당시 체임벌린 내각의 전략이었다.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맺은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를 하나씩 점령해갔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베네룩스 3국, 스칸디나비아반도마저 나치의 제물이 됐다. 프랑스는 전의를 상실하고 휴전 채비에 들어갔다.

1940년 5월 9일 오후 국회의사당에 처칠을 포함한 집권 보수당 핵심 인물 네 명이 모였다. 회의 참석자는 모두 굳은 표정이었다.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처럼 독일 군대가 영국 땅을 짓밟도록 허락하느냐, 맞서 싸우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회동은 엄중했다. 전시총리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처칠은 당적을 이리저리 옮기는 바람에 보수당에 '철새 정치인'이란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그런 처칠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칠은 1934년에 이미 독일의 런던 공습 가능성을 예견했다. 공군력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미덥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칠은 5월 13일 하원에서 호소했다. “나는 오직 피와 수고, 땀과 눈물 외에 국민께 달리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심각한 시련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여러분은 제게 물을 것입니다.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다해 저 괴물과 같은 독재자와 싸우는 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또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냐고. 나는 한마디로 대답하겠습니다. 승리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승리하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공습 공포에 떨었던 런던 시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았다. 런던 폭격은 혹독했고 시민 25%가 집을 잃었다. 9개월간 공습을 꿋꿋이 버틴 것은 승리에 대한 믿음뿐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는, 포식자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포식자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포식자가 다시는 우리 안을 넘보지 못하도록. 2002년 영국 BBC가 '가장 위대한 영국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처칠이 1위였다. 참여자 수가 100만명을 넘었다. 영국 국민은 처칠의 플라세보 마법을 위대한 리더십으로 평가했다.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낸 영국 지도자를 아버지만 몰라봤다.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6>윈스턴 처칠(상) 피, 땀, 눈물 그리고 승리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