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50주년]<上>수많은 연구성과 창출…과학기술 산실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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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학기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내년에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1971년 설립 후 과학기술 요람, 과학영재 교육의 장으로 보낸 50년이었다.

우리나라 산업 및 연구현장에 고급 과학기술인력을 공급하고, 첨단 연구개발(R&D)이 성공리에 이뤄지도록 하는 가장 앞줄에 섰다. KAIST는 이제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서 인정받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최초 과학기술 특성화대학으로 이공계 고등 교육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주과학기술원(GIST)과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KAIST에 뒤이어 탄생했다.

KAIST는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또 이후 50년을 내다보고 있다. KAIST의 지난 50년과 그동안 이뤄온 성과를 정리하고,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50년은 어떤 모습일지 알아본다.

◇과학기술로 경제개발 견인…미국 원조로 기반 마련

KAIST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1년 2월 16일 설립된 한국과학원(KAIS)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 이론과 실제 응용력을 갖춘 이들을 양성, 산업 발전을 견인하자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설립이 준비되던 1960년대는 경제개발 계획 본격화로 과학기술 인력 수요가 높아지는 시기였다. 경제개발 계획과 병행해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 1961년 본격화 됐고, 1967년 경제개발에 필요한 과학기술 진흥정책 전반을 다루는 과학기술처가 신설되기도 했다.

특히 과학기술처는 인력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당시 많은 과학기술 인력들이 국내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등 선진국으로 향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점차 공감대가 형성됐다.

정근모 박사(사진 왼쪽 두 번째)와 터만 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
<정근모 박사(사진 왼쪽 두 번째)와 터만 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박사(당시 미국 브루클린공대 교수)가 1969년 작성, 미국 정부와 국제원조처 등에 제출한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 대학원 설립안'이 KAIST 설립 기폭제가 됐다. 당시 미국은 교육 기관투자를 중심으로 개발도상국 원조 정책을 마련 중이었는데, 존 A. 해너 국제원조처장이 정 박사에게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방향을 물은 결과 우리나라의 응용과학기술 대학원 설립안이 나오게 됐다.

이는 국내 '한국과학원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미국 국제원조처의 600만달러 교육 차관 및 5억4000만원 정부 예산 확보 등 과정을 거쳐 실제 기관 설립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 와중에 미국 국제원조처는 KAIS 설립 가능성 검토 및 자문을 위해 프레데릭 E. 터만 전 스탠포드대 부총장을 단장으로 조사단을 꾸려 우리나라에 파견했다. 조사단에는 정근모 박사도 포함됐는데, 이들은 1971년 1월 5일 독립된 이공계 대학원으로써 KAIS 설립 당위성을 명시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울 홍릉에 첫 터 잡아…새로운 시도로 눈길

KAIS는 서울 홍릉에 터를 잡았다. 같은 위치의 한국개발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등과 과학 연구 단지를 구성,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취지였다.

서울 홍릉에 위치한 KAIS 캠퍼스
<서울 홍릉에 위치한 KAIS 캠퍼스>

1971년 6월 정지공사와 옹벽공사가 시작됐고, 11월에는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 학생기숙사가 완성됐고, 1973년 8월 30일 학사지원동이 마련됐다.

첫 학생들은 1973년 1월 실시된 1회 신입생 전형시험을 거쳐 선발됐다. 건물 미비로 인근 경희대 공학동을 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기계, 산업, 수학 및 물리학, 재료, 전기 및 전자, 화학 및 화공 등 6개 학과에 모두 106명을 선발했다.

KAIS는 당시 새로운 시도를 많이 감행했다. 필기와 면접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했는데, 면접을 참고자료가 아닌 실제 선발 등락에 활용한 첫 사례였다.

실험을 강조한 교과 과정도 특징이었다. 학생에게 실험논문을 쓰는 과제를 부여했다. 또 과학기술 기초, 특허법, 공업경제 및 원가분석법 등도 공통필수 과목으로 부과했다. 과학기술 전반의 소양을 가진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KAIS는 이후 1975년 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했다. 학위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국제 학술지 논문게재를 학위 수여 요건으로 채택한 것도 이목을 끌었다.

◇학사 과정 확충, 대덕 이전 거쳐 지금의 KAIST로

KAIST라는 현재 이름과 학교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이름은 1981년 갖게 됐다. 1980년 시작된 정부의 출연 연구기관 통합작업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KAIS가 1월 5일 KAIST로 통합·발족한 결과다. KIST는 이후 학사와 연구 기능 분리·육성 정책에 따라 1989년 KAIST와 나눠지게 됐다.

KAIS는 KIST와 통합해 KAIST로 출범했다.
<KAIS는 KIST와 통합해 KAIST로 출범했다.>

대학원인 KAIST가 학부과정을 갖추게 된 것은 '한국과학기술대학(KIT)'과의 통합 결과다. KIT는 KAIST 설립 근간인 '한국과학기술원법'에 따라 만들어진 곳이다. 같은 뿌리를 둔 셈이다. KAIST와 함께 교육 체계를 이뤄 학사, 석·박사 과정까지 이어지는 학맥을 이루는데, 설립 초기에는 따로 존재했다. 이를 합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1989년 두 기관의 조직과 운영이 통합됐다.

서울 홍릉에서 현재 대전 대덕으로의 이전은 기관 확충의 결과다. 1980년대 들어 조직이 커지고 더 큰 공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서울 캠퍼스는 한계가 명백했다. 현재 대덕연구단지가 가장 적합한 곳으로 꼽혔다. 이전 진행과 중단이 반복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1987년 3월 새로운 이전처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최종 이전을 마친 시점은 1991년 말이었다. 2009년에는 대전 유성구 문지동에 위치한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가 KAIST에 통합, 현 문지캠퍼스가 됐다.

대덕으로의 KAIST 이전을 위한 건설 기공식 모습
<대덕으로의 KAIST 이전을 위한 건설 기공식 모습>

◇지난 50년 수많은 연구성과로 KAIST 이름 빛내

KAIST는 지난 50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구 성과가 탄생한 곳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한 발 더 미래로 향하는 기반을 쌓아갔다. 최초, 최고 수식어를 단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최초 인터넷, SDN을 구축한 전남길 전산학부 교수
<국내 최초 인터넷, SDN을 구축한 전남길 전산학부 교수>

일례로 국내 최초 인터넷도 KAIST에서 비롯됐다. 전길남 전산학부 교수가 1982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을 구축했다. 당시 대부분 첨단 기술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됐는데, SDN은 이례적으로 우리가 먼저 시작해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거듭나는 핵심 기반이었다.

1990년 KAIST 내 인공지능연구센터 개소식 현장
<1990년 KAIST 내 인공지능연구센터 개소식 현장>

인공지능(AI)과 로봇 분야에서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1990년 우리나라 첫 AI 분야 연구센터 '인공지능연구센터'가 KAIST에 설립, 1997년까지 지능형 센싱 정보 시스템, 한국어 정보처리, 멀티미디어 컴퓨터 시스템, AI 플랫폼 연구 등 국내 AI 및 관련 전산학 분야 연구를 선도해왔다.

양현승 전산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능형이동로봇 'CAIR-1, 2'를 개발했고 2002년에는 AI 휴먼로봇 '아미'를 공개하기도 했다. 로봇 분야 정점은 2015년 미 국방성 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재난로봇 결선대회(DRC)에서 우승한 '휴보'다. 오준호 기계공학과 교수팀의 휴보는 이 대회에서 세계 각국 23개팀을 제치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로봇축구' 종주국이기도 하다.

KAIST이 로봇 휴보
<KAIST이 로봇 휴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주 분야 성과다. KAIST는 1989년 인공위성연구센터(현 인공위성연구소)를 설립, 1992년 발사된 우리별 1호를 만들었다. 우리별 1호로 우리나라를 세계 22번째 상용위성 보유국으로 만들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위성을 개발, 발사하고 있다.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과 우리별 1호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과 우리별 1호>

이와 함께 이상엽 생명화학공학과 특훈교수의 '대사공학', 유룡 화학과 특훈교수의 '나노주형합성법', 조동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의 무선충전 전기버스 등 최초 성과들이 KAIST의 이름을 빛냈다.

KAIST 물리학과 3회 석사과정을 졸업한 신성철 총장
<KAIST 물리학과 3회 석사과정을 졸업한 신성철 총장>

KAIST 물리학과 3회 석사과정(1975~1977) 학생이었기도 한 신성철 KAIST 총장은 “과거 수많은 학생이 밤을 지새우며 경쟁적으로 공부했던 시간이 추억으로 남아있다”며 “KAIST는 우리나라에 수준 높은 교육과 연구 분위기를 조성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최초, 최고 성과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표>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신 한국과학원(KAIS) 설립 과정

<표>KAIST 통합 과정

[KAIST 50주년]<上>수많은 연구성과 창출…과학기술 산실 자리매김
[KAIST 50주년]<上>수많은 연구성과 창출…과학기술 산실 자리매김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