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完全社會]버튼 누르기식 정치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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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지상주의 ⓒ게티이미지뱅크
<외모지상주의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빨리, 그리고 많이 읽는 편이다. 한 친구는 내게 책을 빨리 요약해 읽는 방법을 전수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게 왜 필요한지 물었다. 친구는 책을 전부 읽어야 하는 게 시간 낭비 같아서라고 했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시간 낭비라면 왜 읽으려 하냐고 다시 물었다. 그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압박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친구는 곧 책을 빨리 읽으려고 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스스로 깨닫고, 유튜브 3분 요약 영상만 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깨달음처럼 우리는 정보의 시대를 넘어, 요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남들이 요약해주길 좋아한다. 느린 사람은 탈락하는 시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요약해볼까 한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 관한 이야기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칼리'라고 불리는 기술을 강제적으로 보편의무화시킬 것인지를 두고 찬반 인터뷰가 나열되는 형식의 단편 소설이다. 칼리는 뇌의 신경회로를 건드려 사람의 외모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차단, 외모에 대한 호불호로 발생하는 차별을 없애주는 기술이다. 보통의 작품이 '이기적인 인간은 더 편리하게 차별하는 기술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은 '차별을 없애는 기술에 대해서는 인류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인지 다룬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사회의 숙의 과정을 보여준다. 칼리가 강제되면 외모 차별이 없어질 거라는 찬성파와 칼리 반대파가 치열한 공방을 이룬다. 소설의 전체적 구성, 즉 독자 입장에선 단순한 찬반 의견이 아니라 한 기술이 가지는 다양한 이면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나는 예쁘니까 칼리를 써서 사람들이 내 매력을 몰라보는 게 더 불리해!” 혹은 “나는 못생겼으니까 차별받기 싫어서 칼리가 필요해!” 이상인 것이다.

각자 '찬성'과 '반대'라는 두 범주에 있지만, 그 범주 안에서도 다양한 층위의 논쟁이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대립한다. “어린아이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이 제어 당하도록 부모가 강제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이 옳은 사회를 위한 것이라도?”와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은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평등한 사회를 경험했다”의 주장은 둘 다 일리 있다. “다른 외모에 대한 거부반응이 타자화를 이끌고, 그것이 차별의 근본이 된다”와 “하지만 성격, 재력, 지능, 취향에서 우리가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또한 후손을 낳기 위한 유전적 본능에 불과하다” 역시 한 편을 들기 쉽지 않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결국 칼리 찬성파와 반대파 중 누가 옳은지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숙의 민주주의에서 숙의 과정은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숙고를 거쳐 선호를 결정하는 것이 목표이다. 서로 다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비교해 우위를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우리의 한 표가 행사될 때, 그것이 진정 우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한바탕 쇼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국 대선을 지켜보았다. 좋은 숙의를 한다는 것은 외부와의 토론뿐만 아니라 내부적 성찰, 내적 숙의 또한 포함한다. 한 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서로 다른 관점의 논의들을 부딪치고 깊게 숙고하는 과정에서부터 숙의 민주주의가 발달한다. 그런 점에서 책을 요약해서 읽는 것은 숙의와는 거리가 먼 선택이다.

테드 창 소설은 작가 스스로 말하듯 '자유의지'에 대한 주제가 돋보인다. 그렇다고 딱 자유의지 이야기로만 요약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여론의 책임, 자본주의가 무엇을 도구화할 것인가, 외적 강화와 내적 강화에 대한 인류의 논쟁, 다층적인 이런 관점이 소설의 '가장 핵심 요약만 뽑은 버전'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탈락돼 사라진다.

테드 창을 한 줄 요약으로만 안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 책을 안다는 작은 기쁨 이외에는 달리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그 책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책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처럼 아이디어 수준에서 머무르는 문장은 절대 깊게 발달할 수 없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없다.

현실에 적용했을 때 어떤 복잡한 면면이 생겨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끼리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옳은지, 더 나은 가치를 가졌는지, 더 설득력 있는지를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3분 요약본으로 책과 영화를 볼수록 숙의 불가능한 단편적인 메시지 집합만 늘어갈 뿐이다.

요약으로만 정보를 얻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아주 빠르게 (내가 이해한) 좋음과 (내가 이해하지 못한) 싫음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 극단적인 세계밖에 얻지 못한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려 할수록, 우리의 세계는 극단만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합의가 곧 모든 의견의 중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버튼 누르기식 정치가 아니라 숙의 정치가 필요한 절실한 이유다.

강현 소설가

1996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한양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소설 '나는 바나나다'를 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글을 쓴다.

강현 소설가
<강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