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가죽, 이름, 그리고 빅데이터

이낙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이낙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예로부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한 개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반면 정보기술(IT)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에는 원하든 원치 않던 모든 기록과 행적이 저장돼 전산화된다. 바야흐로 '빅데이터 시대'다.

이미 글로벌 대기업들은 빅데이터가 지닌 무한한 가치에 주목하고 고객맞춤형 제품·서비스에 활용하며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도 디지털 뉴딜을 추진하며 발 빠르게 대응 중이다. 다만 문제는 전체 기업 99%를 차지하는 중소·중견기업의 발걸음이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기업 중 빅데이터 이용기업 비중은 약 3.6%에 불과해 독일, 프랑스 등 20개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조사됐다. 6대 뿌리산업의 경우 더 심각하다. 2020 뿌리산업백서를 보면, 3만2000여개 뿌리기업 대상 설문조사에서 빅데이터 기반 스마트공장 도입 의향을 묻는 질문에 94.2%가량 업체들이 '관심 없음'으로 응답했다.

주조, 금형 등 6대 뿌리산업은 원료를 소재로, 소재를 부품으로 만들어 제조의 근간을 이룬다. 특히 우리나라는 뿌리산업 제조경쟁력이 세계 5위에 든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이 영세해 혁신역량이 부족하고 인력이 고령화되고 있으며 외부변화에 취약해 매출 변동 폭도 크다.

뿌리가 튼튼해야 과실도 풍성하다. 정부는 지난 7월 급변하는 환경 변화를 반영하고 미래형 산업구조로 전환하고자 '뿌리4.0 경쟁력강화 마스터플랜'을 발표해 뿌리산업 기술 범위를 6대에서 14대로 확대했다. 사출·프레스, 3D프린팅, 로봇 등이 새로 포함됐으며 뿌리기업 수도 약 9만개로 3배가량 늘어났다. 이를 규정한 뿌리산업진흥법도 제정 10년 만에 전면 개편한다.

이 같은 제도적 기반이 세워졌다면 이젠 공정혁신 차례다. '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D·N·A)' 기반의 제조지능화가 이를 더 가속화할 수 있다. 제조지능화란 생산과정에서 축적되는 대량의 데이터를 선별적으로 수집·분석해 공정을 첨단화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다. 공정별로 필요한 온·습도와 가동시간, 프로세스부터 숙련기술자 노하우까지 모두 데이터화하면 인력이 바뀌어도 핵심 기술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중소·중견기업의 제조지능화를 지원해오고 있다. 일례로 동양다이캐스팅에 인공지능(AI) 기반 공정 최적화 기술을 지원해 3%가 넘던 부품 불량률을 1%대로 낮춰 연간 7200만원 비용을 절감했다. 지난 9월엔 마스크 제조기업 KS커뮤니케이션에 딥러닝 영상패턴분류 기술을 이전해 수작업에 의존하던 마스크 검수공정을 자동화했다.

이처럼 AI 등 첨단기술 도입이 생산성 및 품질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나, 반드시 기업의 생존과 성공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이를 위해선 현장지식에 입각한 인력 양성과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현장공정을 잘 아는 숙련인력을 대상으로 관련 소프트웨어(SW)를 교육해 그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로 이 점이 현장 기술지원에 특화된 출연연구기관의 강점이자 역할이며, 공정을 잘 모르는 IT 대기업들의 산업지능화 성과가 미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업지능화는 디지털전환 기반의 스마트 제조환경 조성, 나아가 대한민국이 지속가능한 제조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꼭 필요한 핵심 요소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앞으로 제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기업규모 맞춤형 지능화 작업을 단계별로 추진할 방침이다. 단순 데이터 축적이 아닌, 현장인력의 노하우와 경험까지 지능화에 활용할 것이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기업에 새로운 혁신동력을, 현장근로자에 비대면 재택근무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리라 기대한다.

이낙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nklee@kitech.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