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K-디스커버리로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 끊어 내자

[ET단상]K-디스커버리로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 끊어 내자

며칠 전 유럽연합(EU)이 위조·불법복제 감시 명단을 발표했다. 지난 2018년 명단에 등재된 포털 사이트 한 곳과 서울의 유명 재래시장 한 곳이 모두 제외됐다. 그동안 정부와 해당 업체들이 기울인 지식재산 보호 활동 성과가 인정받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 8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라이브방송으로 수백억원대의 위조상품을 판매한 일가족 4명이 특허청 특사경에 적발됐다. 중소기업들은 외국 기업 제품을 가져와 그대로 베껴서 납품해 달라는 원청업체의 요청이 있다고 호소한다. 많은 중소기업이 제품 개발 시 선행기술조사를 하지 않으며, 특허 침해가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 모두 지식재산에 대한 존중 문화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한 결과다.

특허청은 지식재산 보호 강화를 위해 과감히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최근 법 개정을 통해 특허뿐만 아니라 디자인, 상표, 부정경쟁행위, 영업비밀 등에 대한 지식재산 침해소송에서 징벌성 배상 제도를 도입하고 손해액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모두 마무리했다. 앞으로 특허권자가 침해 증거를 쉽게 입수할 수 있도록 하는 증거수집제도, 이른바 K-디스커버리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애초 미국식 디스커버리도 고려했지만 고비용의 미국식 제도가 글로벌 기업과 대기업에 유리하다는 지적이 있어 업계가 선호하는 독일식 증거조사 제도를 모델로 추진하고 있다. 일본도 이미 독일식 제도를 지난 10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K-디스커버리 도입에 대한 일부 업계의 반발도 있다. 선진국보다 기술력이 낮은 우리 기업에 대해 외국 기업의 특허소송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우리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이 통째로 외국 기업의 제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의약품허가-특허연계제도를 놓고 벌인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일부에서는 새로운 제도가 외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국내 제약사를 몰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에 따르면 제도 시행 이후 기업당 연구개발(R&D) 투자가 약 43억원, R&D 인력도 3.7명 각각 증가했다. 이러한 대응에 힘입어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2위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제도가 우리 업계에 보약으로 작용한 것이다.

K-디스커버리가 도입되면 법원이 침해자에게 자료 보전과 함께 보유 자료 목록을 제출토록 명령할 수 있고, 필요시 전문가를 지정해 현장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최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영업비밀 침해소송이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진행되는 것도 침해 증거 확보에 유리한 디스커버리를 이용하기 위함이다. 과거 삼성전자와 애플 간 분쟁에서도 디스커버리 후 고의로 자료를 누락시킨 것이 인정돼 국내 기업에 불리한 판정이 내려진 바 있다. 디스커버리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도 미국에서 우리 기업이 소송에 휘말린다면 외국 변호사가 증거 수집을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디스커버리를 실시, 필요한 자료를 모두 가져가고 있다. 지금도 국내에서는 실제 미국식의 광범위한 증거 수집이 가능한 것이다.

K-디스커버리는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을 바로 잡을 귀중한 치료제가 될 것이다. 침해 걱정 없이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은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우리 기업은 디스커버리가 도입된 미국·영국·독일·호주 등 해외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효율 대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인구 100만명당 특허출원이 각각 세계 1위인 우리나라가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을 근절하면서 혁신 성장으로 체질을 바꾸는 시점을 더 이상 늦출 순 없다.

정연우 특허청 산업재산보호협력국장 yeonwoo8@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