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현 교수의 글로벌 미디어 이해하기]〈31〉새 술은 새 부대에

성기현 연세대 겸임교수
성기현 연세대 겸임교수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 담근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발효 과정에서 부풀어 올라 부대가 터져서 술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릴 수 있어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지혜의 속담이다.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대응 시점에 반드시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미디어 산업의 급속한 변화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 가운데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은 기존 법체계로 다룰 수 없는 규제의 공백이다. 미디어 산업 빅뱅은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카오스로, 현 체계 아래에서 다루기에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국내 상황은 방송법이 수직적 규제일 뿐만 아니라 소위 '포지티브'법 체계이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이런 혼돈 속에 미국에서 발의된 법안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지난 2019년에 발의돼 지난해 7월 시행된 TV시청자보호법안(TVPA)이다. 또 다른 법안으로는 얼마 전에 발의된 '개정된 TV법'(MTA)과 '저널리즘 경쟁과 보존 법안'(JCPA) 등이 있다.

세 법안 모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조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반영한 법안으로 평가된다.

특히 TVPA는 1934년 제정된 통신법 개정 일환 중 가장 최근에 개정된 것으로, 지상파 재전송 협상 시 소규모 유료방송 사업자로 하여금 거대 지상파 방송사와의 단체 협상을 허락한 것이다.

법 시행 후 얼마 전에 실시된 첫 협상에서는 소규모 케이블TV 사업자가 단체 협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개별 협상 때보다 좋은 결과, 즉 낮은 재전송료로 협상을 마칠 수 있었다. 더 좋은 뉴스는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가 협상 과정에서 선의(good faith)로 협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상파 방송사에 벌금을 부여한 것이다.

TVPA처럼 JCPA도 비록 4년 동안이라는 한시적이지만 단체 협상을 할 수 있게 했다. 소규모 뉴스 제작사로 하여금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거대 온라인플랫폼 회사와 뉴스 사용에 대한 협상 시 단체 협상을 허락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말 초당적 디지털시장 경쟁보고서가 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온라인 플랫폼이 궁극적으로 지역뉴스와 지역방송을 약화시키고 큰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게 보고서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보고서 발간 이후 미국 상·하원 반독점 관련 소위원회 중진의원이 JCPA를 발의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법안 MTA는 지상파 재전송 관련 법안으로, 의무 재전송과 재전송 동의를 포함한 구시대적 규제 조항을 없애자는 것이다. 재전송 협상 결렬로 지난해 1년 동안 327번의 방송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또 지상파 재전송료 상승이 유료방송수신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한 시청자의 심각한 불만과 사업자의 강력한 요청으로 국회가 법안을 발의했다.

오늘날 기술에 더 이상 맞지 않는, 1992년에 제정된 구시대적 방송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시청자가 원하는 무엇이든, 어디에서 구매하든, 선택한 기기가 어떤 것이든 시청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상파 방송사는 반대, 유료방송 사업자는 찬성이다.

미국에서 발의된 두 법안의 통과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재 법과 규제가 새로운 방송 환경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상파 재전송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단체 협상으로 거대 사업자와의 협상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야말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규제 틀에 갇힌 국내 미디어 산업이 미디어 빅뱅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규제 당국의 과감한 사고 전환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성기현 연세대 겸임교수 khsung200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