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적고 몸값 높고"…스타트업 '플립' 확산

쿠팡 등 선례…관련문의 5배 이상 급증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투자 조건 내걸어
K-뷰티 '미미박스' 2200억 투자 유치
헬스케어 분야, 테스트·사업 추진 용이

#핀테크 스타트업 A사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터와 미국에 '플립'(flip)하는 것을 조건으로 투자 협상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미국으로의 본사 이전을 검토하게 됐다. 프롭테크 스타트업 B사는 지난해 6월 한국에 법인 설립 직후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염두에 뒀다. 플립도 초기부터 준비했다. 기업 규모가 커지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여러 절차상 수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국내 스타트업이 해외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고 국내에만 있는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플립'에 나서고 있다. 플립은 국내에서 창업한 회사가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쿠팡을 비롯해 센드버드, 미미박스, 아이유노미디어그룹 등이 사례로 꼽힌다. 23일 안희철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는 “올해 플립을 추진하는 스타트업이 지난해 대비 5배 이상 늘었다”면서 “특히 올해 3월 쿠팡 미국법인이 미국 뉴욕 증시 상장에 성공하면서 플립 추진을 검토하는 스타트업이 크게 늘었고,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주된 이유는 해외 투자 유치와 증시 상장, 인수합병(M&A) 등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스타트업의 '성공 보증수표'로 불리는 와이콤비네이터, 테크스타즈 등 글로벌 유명 액셀러레이터는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본사 이전 등을 투자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도 많다. 이들이 선호하는 국가는 미국, 싱가포르 등이다.

K-뷰티 스타트업 '미미박스'는 와이콤비네이터로부터 초기 투자를 받고 난 뒤 미국, 중국 등 해외 진출을 꾀하면서 본사를 미국 실리콘밸리로 옮긴 경우다. 미미박스는 와이콤비네이터로부터 눈도장을 받고 난 이후 다양한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220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 투자자들은 영업이익이 적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해외 벤처캐피털(VC)은 성장성을 인정한 결과다. 국내 한 소셜벤처 최고경영자(CEO)는 “환경 분야 스타트업의 경우 기업 가치를 유럽에서 2배 이상 높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영국으로 본사를 이전해서 투자도 받고 비즈니스를 세계로 넓히려고 플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증권거래소 전광판에 오른 쿠팡 모습. 쿠팡도 플립을 통해 미국 증시 상장을 이뤘다.
뉴욕증권거래소 전광판에 오른 쿠팡 모습. 쿠팡도 플립을 통해 미국 증시 상장을 이뤘다.

해외 증시 상장을 목표로 한 플립도 있다. 이보다 앞서 쿠팡도 플립을 통해 미국 증시 상장을 이뤘다. 미국 '쿠팡LCC'가 본사이며, 한국 쿠팡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국내 규제도 플립 추진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신산업이 전통산업과 부딪쳐서 사업을 철수하는 사례가 늘자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다. 특히 원격의료 분야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경우 비즈니스 적법성 때문에 설립 초기부터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사끼리만 원격진료가 허용되고 의사와 환자 간 원격진료는 불법이다. 국내에서는 테스트조차 어려운 데다 규제가 풀리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플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플립이 만능 열쇠는 아니다. 주식 교환이 복잡한 데다 세금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또 막상 글로벌에서 성과가 미미할 경우 역플립이 벌어지기도 한다. 안 변호사는 “기업 가치가 높게 평가된 후 시도하는 플립은 해외법인 주식과 교환하는 과정에서 창업자에게 많은 양도소득세가 발생하곤 한다”면서 “여러 위험 요인을 낮추기 위해 초기 단계에서 플립을 진행하는 것이 요즘 추세”라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