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5>박 대통령, 경제기획원 '연구소 설립 준비위' 구성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6월 22일 서울 홍릉 인근에 건설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공사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6월 22일 서울 홍릉 인근에 건설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공사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열흘 일정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1965년 5월 27일 귀국하자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한·미 두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 14개 항 가운데 12번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경제기획원은 두 정상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자 연구소 설립 업무를 전상근 당시 기술관리국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에게 맡겼다.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을 대신한 김학렬 차관은 두 나라 정상의 공동성명이 나오자 전상근 국장에게 “한국 정부를 대표해 전 국장이 전권을 갖고 미국 측과 협의, 과학기술 연구소 설립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전상근 국장은 미국 퍼듀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유학파여서 우선 미국 내 인맥이 있고, 미국 측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기술관리국장으로서 전국의 연구기관 실태를 소상히 조사한 적이 있고, 이를 토대로 국내 연구소 통합 작업 경험이 있어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따른 제반 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학렬 차관의 지시를 받은 전상근 국장은 내심 가슴이 벅찼다. 국내 첫 과학기술백서 발간과 과학기술연구기관 개편안 추진에 이어 박 대통령 지시로 1964년 9월 국내 연구소 통합 방안을 마련해 추진했다. 그러나 부처 간 이견으로 진전은 없었다. 전상근 국장에게 떨어진 과학기술연구소의 설립 추진 지시는 한국 미래를 담보할 과학탑을 다시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상근 국장은 먼저 미국 측 동향과 입장 파악을 위해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대외원조기관 유솜(USOM)의 협조를 구했다. 주미 한국대사관도 연구소 설립에 관한 미국 측 견해를 분석한 자료를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보냈다. 분석 자료의 골자는 한·미 두 나라 정상이 합의한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위해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인 도널드 호닉 박사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7월 8일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기획원은 호닉 박사 내한을 앞두고 두 가지를 준비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 방안과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방안이었다. 과학기술 R&D 방안은 △과학기술 종합연구소 설립 △과학기술 연구기금 신설 △과학기술 행정 체계 확립 △연구개발자문위원회 설치 등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현안을 모두 포함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학기술종합 연구소 설립=국내 연구소는 다수가 행정기관 소속이다. 각 연구소는 소속 행정기관의 기술행정 지원 업무에 치중한다. 국가 기초 과제나 종합 응용연구 개발은 기대할 수 없다. 이를 개선해 기초 기술과 응용연구 분야를 전담할 종합과학기술연구소를 설치해야 한다. 연구소에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 민간재단 법인체로 연구소를 발족하고 정부 재정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과학기술 연구기금 신설=R&D 자금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조성과 배분을 위해 정부 예산, 외국 원조, 유엔 특별기금 등을 망라한 과학기술 연구기금 특별회계를 신설해야 한다.

◇과학기술 행정체계 확립=과학기술 행정을 총괄한 행정체계 일원화와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연구공무원에 대한 특별 조치, 연구 활동과 관련한 세제 지원, 기타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필요한 사항은 법제화해야 한다.

◇연구개발자문위 설치=과학기술 R&D를 위한 장기 투자 계획 수립과 연구시설, 연구과제 우선 순위 등을 자문하는 연구개발자문위를 설치해야 한다.

경제기획원은 이 같은 내용을 6월 5일 경제과학심의회의 안건으로 제출해 심의를 거쳤다. 경제기획원은 6월 8일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5월 경제동향보고회의에 과학기술연구개발 방안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서울대 공대 연구시설을 국제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과학기술자 연구수당을 최우선 지급하며 이를 내년도 예산에 이를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회의에는 국무총리, 국무위원,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들이 참석했다.

경제기획원은 6월 10일 오후 2시 회의실에서 3시간여 동안 각계 인사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과학기술 R&D 방안 공청회를 열었다. 경제기획원은 공청회에서 나온 전문가 의견을 수렴, 기존 방안에 반영했다.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호닉 박사 일행을 맞이할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는 한편 국내 과학기술계와 산업계 대표 인사로 연구소 설치 전반에 관한 사항을 심의할 과학기술연구소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연구소 성격과 기구, 연구소 인력 구성, 연구 분야, 연구소 설치에 따른 예산 등에 대해 심의하고 자문에 응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15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최규남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이 선임됐다. 위원은 이종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최형석 원자력연구소장, 이량 서울대 공대학장, 최규원 서울대 문리대 이학부장, 한상준 이화여대 생활과학연구원장, 송대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우룡 상공부 광공업담당 차관보, 장예준 경제기획원 운영담당 차관보, 김용완 한국경제인협회장 등이다. 간사는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이다.

그해 6월 30일. 전상근 국장은 이날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호닉 박사 일행을 맞이할 관계자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회의 중인데 비서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국장님 전화 왔습니다. 이 실장이라고 합니다.” 전상근 국장은 “이 실장이 누구지?”라며 전화기를 들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전상근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속사포처럼 빠른 말소리가 들렸다. “전 국장이요? 나 이 실장인데, 내일 오전 10시 청와대로 들어오시오. 각하께서 연구소 설립에 관한 우리 측 준비 상황을 아시고 싶어 합니다.”

이 실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이후락 실장은 용건만 말하고 곧바로 통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찰깍' 들렸다. 전상근 국장은 이후락 실장이 부처 국장에게 직접 전화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른 비서관을 시켜서 전화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과학연구소 설립은 한·미 두 나라 정상 간 합의 사항이자 한국의 과학기술 미래가 걸린 중대사였다. 이 점을 잘 아는 이후락 실장이 직접 전화한 것이었다.

전상근 국장은 즉시 회의를 중단하고 청와대 지시 내용을 경제기획원 장관과 차관 등에게 보고하고 대통령 보고자료 준비에 착수했다. 밤을 새워서 보고 차트와 자료를 작성한 전상근 국장은 7월 1일 오전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 현관에 담당 비서가 나와서 전상근 국장 일행을 청와대 본관 동쪽에 있는 별실로 안내했다. 별실 응접실에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과 박충훈 상공부 장관이 앉아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응접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이후락 실장이 전상근 국장을 소개했다.

전상근 국장이 일어나 앞으로 나가서 차트를 넘기며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추진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준비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이 회고록(한국의 과학기술 개발)에서 밝힌 내용. “먼저 우리나라 과학기술 현황부터 보고했습니다. 기술관리국에서 조사한 국내 연구기관 실태를 소상하게 말씀드렸어요.”

전상근 국장은 산업체에서 필요한 제품 공정 개선이나 외국에서 기술한 과학기술을 소화하려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두뇌 전부를 총동원해서 조직화할 수 있는 종합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이 절대 필요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전상근 국장은 정부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종합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전상근 국장은 박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연구소 설립과 관련한 내용도 보고했다. 우선 연구소 형태는 △비영리 독립기관으로 하며, 인사와 회계 처리는 자율 체계를 갖추고 연구 용역과 외국 원조와 정부 투자로 운용해야 한다. △업무 범위는 산업기술 및 응용과학 연구, 이와 관련한 기초연구를 원칙으로 한다. △연구자는 해외 과학자를 유치해 활용하고, 국내 과학자들을 조직화한다. △사업은 한·미 공동으로 추진하되 미국 측은 연구 건설 기자재를 제공하고 전문가 초빙과 과학기술자 유치 및 훈련 비용을 부담하며, 한국 측은 연구소 설치에 필요한 부지와 건물 건설을 담당한다. △연구소 운영비는 연구소 용역 수입으로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부족한 비용은 한국과 미국이 공동 지원한다 등이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해외 과학기술자를 유치해서 연구자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아주 좋은 구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할 게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월급도 많이 주고 주택도 제공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전상근 국장의 보고를 받고 말했다. “전 국장,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즉시 내게 직접 보고하시오.” “네, 감사합니다.” 박 대통령은 배석한 이후락 실장을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 사업은 내가 직접 추진해야겠소.” 박 대통령은 이후 과학기술연구소 설립과 관련한 모든 업무를 직접 챙기면서 연구소 추진을 독려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