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23>국내 첫 한미합동 산업실태 조사

1966년 6월 10일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앞줄 왼쪽)과 D.에반스 美 바텔기념연구소 기술용역단 대표가 양 기관 간 자매결연 및 기술용역계약을 맺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6년 6월 10일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앞줄 왼쪽)과 D.에반스 美 바텔기념연구소 기술용역단 대표가 양 기관 간 자매결연 및 기술용역계약을 맺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 20여일 후인 1966년 11월. 연구소는 국내 첫 한미합동조사단을 구성해 국내 산업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단만 80여명. 그동안 이 같은 산업실태조사는 없었다.

이 조사는 연구소 미래와 직결된 중차대한 일이었다. 국내 산업 현황 분석과 미래 예측 그리고 문제점을 찾아 과학기술 연구 수요를 측정해 △산업별 연구 범위를 정하고 △연구원 충원 계획 수립 △연구소 시설과 자금 규모를 정하기 위한 조사였다. 미래 과학기술 좌표 설정을 위한 조사였다.

당시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관계자의 증언.

“연구소 출범 후 연구 분야를 놓고 각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연구소가 모든 분야의 연구를 다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대단했어요. 그렇다고 연구 분야를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어요. 또 모든 분야를 다 수용해 연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교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했어요. 최형섭 소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국내 산업실태 조사를 한 후 연구범위를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자매기관인 미국 바텔기념연구소도 찬성했고 다른 이들도 이견이 없었어요.”

연구소는 산업실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바텔기념연구소 전문가들과 한미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한국 측에서는 연구소와 학계, 산업계 등에서 내로라하는 분야별 전문가 57명이 조사단에 참여했다. 미국 측에서는 연구소 자매기관인 바텔기념연구소에서 전문가 23명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두 나라 조사단 인력만 80명에 달했다.

조사단은 처음 25개 분야를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술과 경제적인 측면 등을 감안해 17개 분야를 조사키로 결정했다.

17개 분야는 △식품공업 △전기기기 공업 △전자공업 △석유화학공업 △고분자공업 △펄프·제지공업 △건축재료공업 △교통 △기계공업 △금속공업 △요업공업 △포장공업 △조선공업 △전자계산기 활용 △분석화학 △과학기술 정보 △부식(腐蝕)과 방식(防蝕) 등이다.

조사단은 서울에서 사전 회의를 열고 조사방법 등을 협의한 후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는 방문조사로 이듬해 8월까지 10개월간 이어졌다. 이 기간 중 조사단은 전국 600여개 기업체를 방문했다. 참고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정부 기관과 대학, 협회 등도 접촉했다.

전자계산기 활용 분야를 담당했던 성기수 박사(전 동명대 총장)의 술회.

“당시 분야별로 사전에 조사 대상자를 선정하고 체크리스트를 작성한 후 현장을 방문해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나는 당시 바텔기념연구소에서 온 과학자 1명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실태 조사를 했는데 당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을 비롯해 기업체 전산실 등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심지어 대구와 오산 미군 부대 전산실까지 방문했어요. 국내에 있는 모든 전산실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기업체 전산실은 말이 전산실이지 시설은 형편없었어요.”

이듬해인 1967년 8월. 조사단은 분야별 조사결과를 취합해 토론을 거쳐 분야별 문제점과 앞으로 연구소가 지향해야 할 사항 등을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식품공업-문제점은 국내 생산원료의 품질과 생산, 공급의 불안성과 비경제적 운영, 너무 비싼 포장재료 등이다. 식물 가공과 저장, 분배 등과 원재료 분야 연구와 관련해 24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전기기기공업-시급히 해결해야 할 점은 원료 공급 부족과 저품질, 전기법안 미비 등이다. 이에 따라 동과 구리, 철판, 도자기 절연체와 재료의 품질 향상, 최신 생산기술을 산업계로 확산하도록 지원하는 법안을 준비해야 한다.

△전자공업-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전자제품 비율은 0.13%에 달한다. 1971년에는 그 비중이 현재 25배인 3.25%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준조립성 생산을 하는 보세가공 공장을 외국 기업이 한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수출생산품을 위한 시장조사를 하고 가능하면 정부 협조를 얻어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시험센터설립과 인력 확보 그리고 정보센터 설립 등을 추진해야 한다.

△석유화학공업-이 분야 문제점은 자본 부족과 원료수입에 부과하는 고액의 세금, 가족 중심의 기업운영, 운송체계 미흡 등이다. 일반기술 서비스회사가 할 수 없는 특수기술서비스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또 국내에서 생산하는 윤활유 품질조사 등 몇 가지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분자공업-다수 공장에 품질관리 과정이 미비하고 규모가 영세하다. 실태를 파악하고 고분자공업 기술을 한국에 도입해 관련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유지보강 플라스틱 생산과 고무공장을 위한 카본블랙 원료인 한국산 무연탄에 대한 정책적 배려 등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펄프·제지공업-이 분야 생산업체는 영세하고 산림 부족으로 펄프 생산이 제한적이다. 제지를 위한 유지질의 평가부터 종합적인 조림계획 개발에 관한 대책이 시급하다.

△건설재료공업-한국 도시화는 10년마다 2배 크기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도시집중 현상에 대응한 주택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건축자재와 기술 개선이 어느 나라보다 시급하다. 연구소는 건축자재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재건축에 대한 경제성 조사도 실시해야 한다.

△교통-한국 교통시설은 산업발전에 발맞춰 빨리 확장해야 한다. 교통에 대한 훈련과 경험이 많은 전문가를 채용해 구체적인 교통정보를 수립, 처리하는 교통정보센터 설립을 연구소가 지원해야 한다.

△기계공업-이 분야는 자본 부족과 우량품 생산을 제한하는 판로, 생산관리 미비, 품질관리를 위한 규격이 미흡하다. 공작기계 설계와 활용에 관한 연구와 가공방업과 제도 분석, 계량한 소형 내연기관 개발 등이 시급하다.

△금속공업-이 분야는 원시적인 시설과 근대적인 시설이 혼재해 있다. 자산장치 구입과 장기투자를 위한 자본이 부족하고 외국 기술정보와 생산방법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 정보를 알려주는 도서 구입과 정보센터 설립, 국내 생산 철물의 유출증가를 위한 실험실 규모의 연구 등이 시급하다.

△요업공업-소자와 내화물, 시멘트, 반상기, 타일, 위생기구, 전기용 도자기류 등을 조사해 국내 생산재료의 선광(選鑛) 등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포장공업-이 분야 주요 생산품은 골판지 상자 등이다. 다량의 금속 깡통류를 수입하고 있다. 효과적인 포장규격이 명확하지 않고 포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가 낮다. 수출포장규격 평가를 위한 조사가 필요하다.

△주조공업-다수 주조공장이 최소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해 시험과 조절장치가 부족하며 규격이 같지 않다. 연구소가 한국 실정에 맞도록 현대적인 주조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을 수행해야 한다.

△전자계산기 활용-연구소가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려면 전자계산기 힘을 빌려야 한다. 한국 전자계산화 발전을 막는 요인은 자본 부족과 훈련받은 전문 인력 확보난, 전자계산기 운영과 시장성에 대한 경험부족 등이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분석화학-한국 고분자시험실은 대부분 참고 규격을 갖추지 못했다. 무기물질 분석능력도 충분하지 못하고 유기물질 분석능력이 없다. 능력있는 분석진을 확보하고 기기와 요원확보 등이 시급하다.

△과학기술정보-연구소에서 각 분야에 대한 기술정보센터를 설립, 운영해 정부와 산업계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부식(腐蝕)과 방식(防蝕)-공업용수 처리로 인한 부식문제. 즉, 용수처리법과 배관, 열교환기와 보일러 등 부식과 공업연료에서 나오는 부식, 지하 배설관의 비저항도, 미생물 등에 의한 부식 문제가 심각하다.

최형섭 소장은 17개 분야 조사단이 제출한 결과를 심층 분석해 공통적인 문제점을 아래와 같이 도출했다.

첫째, 산업계는 기술개발을 갈망하지만 해외 정보를 주로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기업체가 필요한 각종 기술자료를 손쉽게 입수하거나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 현장 기술자들이 최신 기술에 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셋째,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해외 과학기술 도입 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연구소는 이 조사결과를 토대로 내부 논의를 거쳐 국내 산업이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범위를 결정했다. 연구소는 중점 연구개발 대상으로 △재료공업 △기계공업 △전자공업 △화학공업 △식품공업 5개 분야를 선정했다. 또 기타 분야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 △공업 경영과 건설 △기술정보 △자재시험 분석 등을 연구 범위에 포함시켰다. EDPS는 당시 용어조차도 생소했지만 연구소는 꼭 연구해야 할 분야라고 판단했다.

이 조사결과는 기술연구소가 해외 과학자를 유치할 때 중요한 선발 기준으로 활용됐다.

최형섭 소장은 해외 과학자들에게 연구소 조사한 분야별 실태와 문제점을 제시하고 각자 원하는 분야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토록 했다. 최 소장은 이들이 제출한 연구계획서를 심층 검토해 최종 과학자를 선발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