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33>과학한국 토대, 과학기술 20년 장기계획 수립

1968년 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처를 찾아 새해 업무보고를 듣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처를 찾아 새해 업무보고를 듣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8년 1월 17일 오전 9시 50분. 박정희 대통령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과학기술처 현관 앞에 도착했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이 박 대통령을 영접했다. 박 대통령은 곧장 대회의실로 올라갔다. 김기형 장관은 이날 박 대통령에게 오전 10시부터 1시간 30분에 걸쳐 과학기술처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업무보고가 끝나자 “선진국 과학기술을 조속히 도입해 우리 실정에 맞도록 모방하고, 기초과학기술을 중점 개발해 달라”면서 “과학자들이 우리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는데 선봉장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경주 첨성대를 보호할 것과 다보탑 등을 과학적으로 보존하는 방안을 연구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형기 장관은 업무보고에서 “유능한 인력을 연구직 공무원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기술연구직 공무원법을 개정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가장 중요한 행사인 새해 업무보고를 무사히 마친 과학기술처는 1967년 6월부터 시작한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계획은 과학기술처 야심작으로, 과학한국의 미래 청사진이었다. 1986년까지 장기 과학기술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김기형 장관의 생전 회고. “계획은 기술 자립을 위한 한국 과학기술의 20년 목표와 정책 방향 등을 제시한 설계도였습니다. 특히 인력개발과 인력양성 사업에 주력했습니다. 기업이나 연구기관이나 최고 인력에서 최고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인력 확보와 양성에 노력했습니다.”

과학기술처는 이 작업을 3단계로 나눠 진행했다. 1단계는 관련 기관에 학술 용역을 주고, 이를 토대로 과학기술 장기 전망과 종합적인 기본 정책안을 만들었다. 과학기술처는 먼저 기획위원회와 작업반을 구성했다. 그해 8월 1일 장기종합 계획 작성을 위해 한국생산성본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종합기술공사와 분야별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기관은 12월 말까지 조사연구 보고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키로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는 과학기술진흥 장기정책 수립을 위한 조사연구를 맡겼다. 조사 내용은 기초과학과 제조공업·원자력 분야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실태를 조사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나아갈 과학기술개발 방향을 전망한 뒤 그에 따라 산업별 단기·중기·장기로 나눠 과학기술 개발 목표를 제시하는 업무였다. 기술연구소에서 이 업무는 한상준 박사가 담당했다.

2단계는 각계 의견을 수렴해 부문별 과학기술개발 투자계획 방향을 설정했다. 학회·기업체와 관련 부처 간 협의를 거쳐 투자계획안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기술 장기 전망과 개발 방향을 결정했다. 이 작업에 참여한 국내 과학기술자는 4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당시 40개 분야별 작업에 참여했다.

과학기술처는 이런 내용을 경제장관회의와 청와대에 보고했다. 3단계는 이렇게 마련한 계획안에 대해 정책 수단에 문제는 없는지 부문별 상호 검증과정을 거쳤다. 이를 토대로 연구개발과 인력, 자원조사, 기술도입 등 정책 수단을 종합해 최종 계획안을 만들었다.

1968년 10월 20일 오전.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 과학기술 장기 방향 설정을 위해 학계와 산업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올해 말까지 과학한국의 미래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계획안은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1968년 12월 17일 오후 과학기술진흥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당시 과학기술진흥위원은 △안동혁 한양대 교수 △권녕대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 △이제구 서울대 의대학장 △김동일 과기단체총련부회장 △최이순 연세대 가정대학장 △전택보 천우사 사장 △이민제 서울대 생물학 교수 △조병하 경북대 산업연구소장 등 8명이었다. 이들은 과학기술 정책 자문과 심의를 담당했다.

과학기술처는 같은 해 12월 27일 과학기술개발 장기계획안을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했다. 국무회의는 12월 31일 과학기술처 원안대로 장기종합계획을 심의, 통과시켰다. 작업에 참여했던 고명찬 전 국립중앙과학관장(당시 과학기술처 진흥과 행정계장)의 회고. “당시 진흥국 전 직원이 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부처 간 협의와 대통령 보고 등의 과정을 거쳐 계획안을 확정했습니다. 20년 장기계획이어서 작업량이 방대했습니다. 산업별 구체적인 목표 전략을 제시해 당시 과학한국 미래 설계도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국내 첫 장기 계획이었습니다.”

과학기술처는 1980년대에는 과학기술 자립기로, 외국 과학기술 의존에서 벗어난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계획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장기 전망과 개발전략 △과학기술의 현황과 과제 △과학기술 장기목표와 개발 방향 △과학기술 개발정책과 투자 방향 △기초과학과 산업기술의 개발 방향 △계획 집행과 관리 등 6개 항으로 구분했다.

과학기술처는 항목별 목표 달성을 위해 연구개발비를 국민총생산액(GNP)의 2.5% 이상 투자하고 기능공 200만명을 확보하며, 특히 기초과학을 집중 육성키로 했다. 20년 장기종합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5년 단위로 중기 계획을 수립하고 매년 구체적인 시행 계획을 수립키로 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아래와 같은 7개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연구개발비를 극대화해 GNP의 2.5% 이상 투자한다. 당시 연구개발비는 GNP의 0.5% 수준이었다. 또 민간기업의 연구개발투자를 확대해 정부와 민간의 투자비율을 50대 50으로 추진한다. 정부는 산·학·연 삼위일체 연구체계를 확립한다. 둘째 외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과학자와 기술자, 기능공을 대폭 양성한다. 20년 후 과학기술자 15만명, 이공계 교수 1만1000명, 기능공 200만명을 확보한다. 셋째 기초과학을 집중 육성하고 세계 수준의 과학자를 배출한다. 넷째 기술 의존에서 기술 자립으로 도약하기 위해 경공업 분야 시설과 기술, 용역을 완전 국산화한다. 다섯째 한국공업규격 수준을 국제통용 규격 수준으로 격상하고, 특허 해외 진출과 기술 수출을 추진한다. 여섯째 국내 부존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를 기술개발로 뒷받침한다. 일곱째 국민의 창의적 정신 진작과 과학 생활화 풍토 조성으로 과학한국을 이룩한다.

과학기술처는 이를 위해 선진 과학기술 도입을 추진하고 과학기술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민간 과학기술 활동 강화 등을 추진키로 했다. 기술 자립화를 위해 과학기술 정보교류를 강화하고 전자공업, 요업, 농산가공 등 기술을 정부와 대학·기업이 함께 개발키로 했다. 과학기술 풍토 조성과 국민의 과학기술 인식 제고, 개발 제도 정비 등 기반을 구축하고 인재 양성과 산·학·연 연대 강화, 해외 과학자 유치 등으로 선진과학기술 도입과 연구 개발 활동 강화, 과학기술 정보교류 확대 등으로 낙후한 과학기술 개발 능력을 발전시키기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장기계획에서 연구시설 확충을 위한 연구학원단지를 조성한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연구학원 단지는 공동 시설로 공작센터, 재료센터, 계산센터, 재료시험센터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런 연구학원도시 건설 구상은 1973년부터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처는 대학별 연구 활동을 특화하고, 이공계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도 확대하며, 연구원 해외 교류와 재외 과학기술자를 적극 유치키로 했다. 또 정부 소유 특허를 무상으로 기업에 이전해 실용화하고 과학기술기금을 증액 조성키로 했다.

정부는 기업의 연구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비에 대해 세제상 혜택을 주기로 했다. 자본재 도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대신 기술 도입을 촉진키로 하며, 이를 위해 기술도입법 제정과 행정 일원화를 추진키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산업기술 개발 방향도 정했다. 분야별 투자할 재원 조달과 투자 계획도 확정했다. 이 같은 종합계획은 과학기술 진흥과 과학기술 중심 국가로 가는 이정표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