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기술 개발 이정표

권기영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 원장
권기영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 원장

2020년이 지나면서 탄소중립은 전 세계 공통 주류담론이 됐다. 많은 국가가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해외 주요 기업들도 RE100에 참여했다.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세를 논의하는 등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실행 노력이 본격화됐다. 특히 약 220개 글로벌 투자사들이 '탄소중립 자산운용사 이니셔티브'를 출범했다. 57조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기후변화 대응에 투자하기로 하고 엑슨모빌 이사진의 일부를 신재생 전문가로 교체하는 등 실행에 나섰다. 기업에도 탄소중립 대응은 '발등의 불'로 다가왔다.

그러나 탄소중립은 매우 어렵고 돈이 많이 드는 길이다. 기존 발전시스템이나 제조공정을 탄소중립 시스템으로 바꾸려면 혁신적인 기술들을 상용화하고 관련 설비들도 교체해야 한다. 발전소나 제철, 정유 공정처럼 대형 설비들이 한번 설치된 뒤 수십년간 가동되는 곳들은 설비 교체에만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이 투입된다.

이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 바로 '기술 혁신'이다. 리튬이온 배터리 가격을 대폭 낮춰서 전기차 보급이 크게 늘고 있는 것처럼 그린수소 공급비용을 크게 낮추면 화석연료나 원료를 사용하는 발전, 제조공정에서 훨씬 저렴하게 탄소중립에 다가갈 수 있다. 태양광은 모듈 효율을 2050년 36%까지 높이면 설치 면적을 지금의 절반 가까이 줄여서 토지비용도 아낄 수 있다. 기회비용 측면에서도 기술혁신 투자가 돈이 가장 적게 든다. 본격적인 설비투자에 앞서 다양한 기술 옵션을 검토하고 가성비가 가장 좋은 기술을 선택하는 것이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기술 개발이 탄소중립 투자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ET시론]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기술 개발 이정표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은 이런 가늠자들을 만들기 위해 지난해 약 200명의 산·학·연 전문가들과 함께 탄소중립 에너지기술 로드맵 수립 작업을 했다.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과 2050년 탄소중립 실현에 필요한 13개 기술 분야 197개 핵심 기술에 대해 개발 일정과 목표, 확보 방안 등을 제시했다.

13개 기술 분야는 크게 에너지 생산 분야, 에너지 전달·이용 분야, 기반 분야로 나눴다. 에너지 생산 분야에서는 기존 석탄·가스발전을 대체하는 수소·암모니아 기반의 무탄소발전,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그린수소 기술 로드맵을 제시했다. 발전용 수소터빈 기술은 2030년까지 수소혼소율 50%에 복합효율 63%, 2050년까지 수소 전소 및 복합효율 65% 이상 실증을 목표로 설정했다. 연료전지는 ㎿급 이상의 복합발전 시스템을 상용화해 2030년 60%, 2040년 65% 이상으로 발전효율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태양광은 '페로브스카이트-결정질 실리콘 다중접합 전지'를 개발해 모듈 효율을 2030년 28%, 2050년 36%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영농형이나 수상 태양광을 개발해 다양한 입지에 설치하도록 할 것이다. 풍력은 초대형 해상풍력 발전시스템 상용화를 목표로 2030년 15㎿, 2040년 20㎿ 풍력발전기 개발을 완료하고 20㎿급 부유식 해상풍력 발전시스템도 2045년까지 상용화해 2050년에는 상용단지를 수출하고자 한다. 그린수소는 재생에너지에서 생산된 전력을 활용해 수소를 생산하는 100㎿급 시스템을 2050년까지 개발하고 장거리·대용량 운송에 유리한 수소 액화 시스템도 액화효율 ㎏당 6㎾h 이상, 하루 50톤급을 2050년까지 상용화할 예정이다.

에너지 전달·이용 분야에서는 국가 에너지망 안정성·유연성 확보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데 기여하는 에너지 저장, 계통 선진화, 고효율화 관련 로드맵을 제시했다. 에너지 저장은 재생에너지 출력 변동에 대비해 120시간 이상 전력 공급이 가능한 대용량 에너지저장시스템과 초고속·장수명 특성을 갖춘 전기차 충전용 에너지저장시스템 개발을 목표로 한다. '섹터커플링'은 재생에너지에서 생산된 전력을 열이나 화학물질 및 기계적으로 저장·변환하는 기술로 2050년에 500㎿급 카르노배터리 축열발전 시스템, 50㎿급 차세대 공기압축 저장시스템 등을 개발하고자 한다. 전력계통 분야에서는 교류·직류 하이브리드 전력계통을 개발해 2035년까지 20㎿급 배전급 변전선로에 실증하고 2040년까지 GW급 변전소 실증을 계획하고 있다. 산단·건물에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고 커뮤니티 단위 최적화를 추진해 2050년에는 에너지 효율을 25% 높이고 운영 비용을 30% 저감할 것이다. 에너지 설비 측면에서도 전동기, 히트펌프 등 에너지 다소비 기기 효율을 지속해서 높일 계획이다.

기반 분야에서는 산업 공정 부산물이나 폐자원을 재자원화하는 자원순환,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CCUS) 등 로드맵을 제시했다. 저탄소 순환경제 구축의 핵심인 자원순환은 재생자원 산업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요소기술을 개발해 2050년까지 재자원화율 94% 이상, 노후 기기, 전기차, 태양광 등 재제조율 30% 이상을 달성할 것이다. 정유는 수소, 암모니아 등 무탄소 열원으로 2050년까지 100% 대체하고 차세대 바이오 원유 제조기술도 확보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투자할 것이다. CCUS는 발전·산업 부문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포집기술을 혁신해 2050년까지 단위설비 포집량 연 400만톤, 포집비용 톤당 20달러 이하를 달성하고자 한다. 또 1500만톤 규모의 해양·지중저장소도 구축, 운영할 계획이다.

탄소중립은 우리 에너지 생산과 이용 방식을 완전히 전환하는 도전 과제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탄소중립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위에 설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수소와 재생에너지로 시작하는 에너지 시스템 진화가 모든 산업 공정과 국민 에너지 이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이 바로 정부와 기업이 탄소중립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권기영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 원장 kweon_wind@ketep.re.kr

○권기영 원장은…

30년 동안 풍력과 전력 등 에너지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한 전문가다. 공공기관보다 민간에서 일한 경험이 더 많고, 에너지 산업 생태계에 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5년생으로,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리버풀대에서 전기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효성중공업에 입사해 기술연구소 전력팀과 기반기술팀에서 일했다. 이후 효성중공업에서 상무로 있으면서 풍력사업단을 이끌었다. 2016년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으로 자리를 옮겨 풍력PD로 활동했으며, 지난해 7월 에기평 원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