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40>과학원생 병역특례 결정

1969년 4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정부 여당연석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9년 4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정부 여당연석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0년 3월 19일. 과학기술처는 김기형 장관 명의의 초청장을 정근모 박사(전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보냈다. 과학기술처가 정 박사를 초청한 이유는 한국과학원 설립을 자문하기 위함이었다. 과학기술처는 당시 대외비로 '한국 과학기술 대학원 설립 구상(안)'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대학원 설립을 정부에 처음 제안한 정근모 박사의 조언이 절실했다.

김 장관 초청장을 받은 정 박사는 같은 달 24일 일시 귀국했다. 한국에 도착한 정 박사는 제안서와 관련해 당정협의회의에서 보고할 브리핑 자료를 준비했다. 정 박사는 과학기술처 직원과 함께 본인이 제안했던 영문사업 계획서를 한글로 번역해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

같은 해 4월 8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경제기획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당정협의회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 백남억 공화당 정책위의장,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 김학렬 경제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홍종철 문교부 장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정근모 박사는 과학기술 특수대학원 설립안을 브리핑했다. 브리핑 골자는 △특수이공계 대학원을 일반 국립대학과 달리 특수법인체로 설립하며, 대학 자율성과 운영의 신축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교육 방향은 국가가 추진하는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지원토록 설정한다 △기업 수요에 부응하는 고급 이공계 인재양성기관을 지향한다 등이었다.

정 박사는 긴장했지만 1시간여에 걸려 침착하게 브리핑을 끝냈다.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은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과학기술 인력을 꾸준히 양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입니다. 조국 근대화와 산업을 진흥하려면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고급 인재 양성이 그 핵심입니다.” 정 박사 브리핑이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안에 대해 각자 의견을 말해 보시오.”

가장 먼저 대학교육을 총괄하는 홍종철 문교부 장관이 발언했다. 그는 과학원 설립에 강하게 반대했다. 홍 장관은 “대학생 시위가 한 고비를 넘긴 상태이지만 교수가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에 반대하고 있어 자칫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홍 장관은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으로서 초대 대통령 경호실장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이른바 혁명 주체 세력으로, 실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좌중을 압도했고, 회의장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해졌다.

정 박사는 '이러다가는 자칫 특수대학원 설립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며 내심 불안했다.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박 대통령이 다시 말을 했다. “우리 중 대학을 가장 잘 아는 남 장관의 의견은 어떻소?” 남 장관은 경제과학심의위원을 거쳐 1969년 10월 재무부 장관에 발탁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었다. 남 장관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문교부 장관의 걱정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추진하시는 산업 발전을 이룩하려면 인재 양성은 절대 필요합니다. 문교부 반대가 심하니 이공계 특수대학원은 문교부 예산으로 추진하지 마시고 경제개발 특별 예산으로 추진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공계 특수대학원을 설립하되 여러 가지 국내 상황을 고려해 문교부가 이 업무를 맡지 않는 절묘한 해법이었다. 이 발언에 참석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근모 전 장관의 회고록 설명. “남 장관은 시대 타당성과 대통령의 의중, 다른 부처 반대를 모두 고려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흔히 대립적인 사안을 다룰 때 사람들은 '해야 하는 이유'와 '하면 안 되는 이유'로 나눠 설전을 벌이지만 남 장관은 무의미한 논쟁을 하지 않고 '일이 되는 방법'을 제시했다. 40대 대학 교수가 경제과학심의위원을 거쳐 재무부 장관에 발탁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박 대통령은 남 장관의 발언이 끝나자 잠시 후 지시했다. “이 특수대학원 설립은 문교부가 아닌 과학기술처가 맡아서 추진하시오.”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이 크게 대답했다. “예,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과학원(KAIS) 설립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처가 한국과학원법을 제정하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어야 했다. 관계 부처 간 이견 해소가 가장 어려웠다. 과학기술처 인력담당관실은 국장 이하 직원들이 주말도 없이 바쁘게 뛰었다.

한국과학원 설립에 기존 대학 교수들은 예상대로 강력히 반대했다. 심지어 서울대는 한국과학원을 신설할 바에야 그 재원으로 서울대를 지원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일부 교수는 미국에 편지를 보내 한국과학원 설립이 부당하므로 미국 측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당시 과학기술처 인력담당관)의 증언. “기존 대학 교수의 반발이 생각보다 심하자 우리는 입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문교부와 각 대학을 다니며 한동안 설득작업을 했습니다. 반대가 심한 이공계 교수를 찾아가 '왜 과학원을 설립해야 하는지'와 '과학원 설립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지' 등을 소상히 설명했어요. 반대하던 교수도 과학원 설립 취지에 차츰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 꽃을 피우기 위해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한국과학원이란 명칭을 정하는 데도 문교부와 입장이 갈렸다. 과학기술처는 처음 명칭을 '한국과학기술특수대학원'으로 정해 문교부와 협의를 시작했다. 이에 문교부는 고등교육 이원화 우려가 있다며 이 명칭에 반대했다. 과학기술처는 '대학'이란 단어를 명칭에서 삭제했다. 권원기 전 차관의 말. “대학이란 말을 빼자 내부에서 '기술'과 '특수'라는 글자보다 포괄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표현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명칭을 한국과학원으로 결정했습니다.” 한국과학원의 영어 표기는 KAIS(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로 결정했다. 이 명칭은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USAID(미국국제개발처)와 협의해 정했다.

가장 큰 난제는 한국과학원생에 대한 병역특례 조치였다. 병역특례 아이디어는 인력담당관 내부에서 나왔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내부 토론을 거쳐 김기형 장관에게 이 안을 건의했다. 권 전 차관의 회고. “과학한국을 이끌 유능한 과학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단없는 학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원생에 병역특례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인재 유치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습니다. 이런 의견을 장관에게 보고했습니다.”

김기형 장관은 보고를 받고 “아주 좋은 의견”이라며 “부처 간 협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따라 국방부와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안보를 최우선하던 시절이었다. 국방부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그게 가당하기나 한 일이냐”며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권 전 차관은 수차례 국방부를 방문해 실무 협의를 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국방 의무는 헌법상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다. 당시 남북관계는 일촉즉발의 긴장관계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 사태로 남북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고, 정부는 그해 4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학원생에게 병역특례 조치를 취하자는 과학기술처 입장에 국방부는 협의조차 거부했다.

두 부처 간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자 과학기술처는 할 수 없이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병역특례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으로 해결했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증언. “당시 상황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병역특례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국방부 협조는 불가능했습니다. 한국과학원생에 대한 병역특례 조치는 우리나라 병무행정상 첫번째 일입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의 과학입국 구현과 과학기술 인재 양성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국가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즉시 결단했습니다. 이 조치는 박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