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17)AI 시대, 인간의 자아(自我)

[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17)AI 시대, 인간의 자아(自我)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모방한다. 그래서 AI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을 알아야 한다. 각각의 인간을 보면 나약하고, 생로병사의 고통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타인이라는 거울 없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공동체에서 칭찬을 받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속삭임을 듣는 등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자아를 느낀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생사를 건 투쟁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는 삶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은 타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이 나를 인정해 주기만을 바라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AI 시대라고 다르지 않다.

루마니아 작가 에우제네 이오네스코의 연극 '대머리 여가수'를 보자. 집주인 스미스 부부는 신문에서 바비 왓슨의 부고를 보고 왓슨 가문은 같은 이름을 쓰는 까닭에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린다고 한다. 손님으로 방문한 마틴 부부는 함께 왔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서로 인사를 하다가 자신들이 부부임을 깨닫고 포옹한다. 화재 예방을 위해 방문한 소방대장은 스미스 부인에게 뜬금없이 대머리 여가수에 대해 묻지만 그녀는 항상 같은 머리 스타일이라고 동문서답을 듣는다. 이 연극은 마치 꿈속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와 상황이 반복된다. 개성 없는 불통 사회, 피상적인 가족관계, 부조리한 일상의 반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부조리하다면 AI 세상도 부조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일합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다. 당시 그에게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네살배기 아들 안준생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되고 가족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도망다녔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도와주긴 했으나 잠시였다. 안준생의 삶은 고통의 연속으로, 내내 쫓기며 살았다. 조선총독부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살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선택했지만 왜 나는 나의 삶을 선택할 수 없습니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나는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는 조선의 영웅이지만 가족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그의 항변이다. 일본이 준 돈으로 약국을 차렸다. 1939년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고. 그리고 눈물을 쏟았다. 김구 선생은 그를 변절자로 규정하고 응징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광복 후 가족을 미국에 보내고 혼자 한국에 들어왔고,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명망 높은 의사가 되었다. 안준생의 마지막 말이다. “영웅의 아들은 개같이 살았지만 변절자의 아들은 아픈 사람을 고치는 삶을 살 것이다.”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겠다.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AI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 어떤 공동체이든 신기술이 기득권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새로운 세력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AI도 마찬가지다. 돈이 많은 기득권 기업에 봉사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젊은 기업에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인간에게 문명을 줄 수 있지만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AI에 완벽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AI는 우리를 닮았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데 AI에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인간을 이해하고 AI를 이해해야 해결책이 나온다. 오직 타인에게만 인정받고자 하는 삶을 뛰어넘어야 한다. 인간 개체를 초월해서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공존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 인간의 진정한 자아 찾기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