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美 '칩4 동맹·칩스법 규제' 압박 vs 中 '제2 사드 사태' 보복 우려

韓 반도체 산업 '선택의 기로'
美 "이달 중 칩4 참여 확답 요구"
中 "한 가입, 상업적 자살행위" 경고
기업 대응 한계…정부 고민 깊어져

[스페셜리포트]美 '칩4 동맹·칩스법 규제' 압박 vs 中 '제2 사드 사태' 보복 우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기로에 섰다. 반도체 굴기를 성공시키려는 중국과 자국 주도 공급망 재편에 나서는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형국이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전략 무기로 탈바꿈한 만큼 '균형'을 앞세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반도체 산업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칩4 동맹' 가입 여부 촉각…'제2 사드 사태' 오나

미국은 대만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반도체 공급망 동맹 '칩4'를 추진 중이다.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고 미국 주도로 새판을 짜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대만과 일본이 적극 참여 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우리나라에도 이달 중으로 칩4 참여 확답을 요구했다. 정부는 우선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에 열릴 칩4 예비 회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회의 이후 의제나 참여 여부를 확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칩4 동맹 권유는 단순 '러브콜'이 아닌 압박에 가깝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미국은 최근 '반도체 지원 플러스 법안(칩스 플러스법)'을 국회 통과시켰다. 9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다. 총 520억달러(약 68조원) 규모 지원책을 담은 이 법안은 서명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이 같은 속도전은 미국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현재 진행형'일 뿐만 아니라 조금씩 성과를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최근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10%를 돌파했다. 반도체 자급률도 꾸준히 늘리고 있다. 미국이 이를 견제하려면 반도체 생산 능력을 가진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 협력이 필수다. 미국이 칩4 동맹 역시 속전속결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가 칩4 동맹 가입 시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사드 사태 이후 최대 경제 보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중국 반발이 거세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우리나라와 중국 간 무역 규모와 반도체 수출 시장 규모를 언급하며 “한국은 장기적 이익과 공평하고 개방적인 시장 원칙에서 출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으로 일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실상 칩4 동맹 가입을 견제한 것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금액은 768억달러(약 100조원)로 전체 반도체 수출 규모에서 60%(홍콩 포함)를 차지한다. 중국 시장 의존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중국 관영 매체는 우리나라의 칩4 동맹 가입을 두고 “상업적 자살행위”라고 경고한 바 있다.

◇美 반도체 지원 플러스 법안도 중국 사업 '발목'

발효를 앞둔 미국 칩스 플러스 법안에는 수혜기업의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항목이 있다. 중국 또는 기타 우려되는 외국에 반도체 제조 능력의 물질적 확장과 관련된 거래는 정부에 보고해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칩스 플러스 법 최대 수혜 기업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와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SK하이닉스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과 우시 등 주요 공장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이들 공장이 중국 소재인만큼 생산 능력 확장이 법안에 가로막힐 공산이 크다.

미국이 반도체 첨단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14나노 이하 공정 장비의 중국 반입을 차단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첨단 공정 장비를 반입하지 못하면 생산 역량을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삼성전자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와 SK하이닉스의 D램 중국 생산 비중은 40~5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첨단 공정이 대부분 평택과 이천(향후 용인) 등 국내 포진한 만큼 당장 영향권에는 들지 않을 수 있다. 첨단 공정 기반 반도체 생산 능력을 중국에서 확장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EUV 등 첨단 공정 장비는 대부분 국내에서 활용하는 만큼 당장 중국 반입 차단의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중국 투자 제한이 장기화하면 투자 등 사업 전략 수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 대응 한계…정부 고민 더욱 깊어질 듯

지난달 방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칩4 동맹과 관련 “정부나 다른 곳에서 이 문제들을 잘 다루리라 생각한다”면서 “거기에 같이 논의돼 저희한테 가장 유리한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언급했다. 칩4 동맹을 비롯한 미·중 반도체 갈등의 해결책을 기업 입장에서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미·중의 움직임은 정치·외교·안보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킨 상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자체로 돌파구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와 관련된 다른 산업과의 연관성까지 따지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고수한 '균형' 전략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한 대학 교수는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 눈치를 보며 줄다리기했던 전략이 앞으로는 먹히지 않을 공산이 크다”면서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