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62>과학기술처, 정보산업국 신설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2월 17일 과학기술처 연두순시 중 업무계획 보고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2월 17일 과학기술처 연두순시 중 업무계획 보고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5년 6월 3일. 국무회의는 이날 과학기술처가 마련한 '정보산업국 설치안'을 의결했다. 국내 최초의 정보산업 육성을 전담할 정보산업국 설치였다. 이는 미래 도약을 위한 날갯짓이었다. 정부는 이 설치안을 같은 달 21일 공포했다. 당시 정보산업 육성과 기반 구축을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한 각료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최형섭 장관은 정보산업이 미래를 좌우할 핵심 산업이란 소신 아래 정보산업을 과학기술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자면 정보산업 육성을 전담할 조직인 정보산업국 신설이 절실했다.

최형섭 장관은 1973년부터 정보산업국 신설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최 장관은 당시 행정기관 조직과 인력을 담당하는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정보산업 육성을 전담할 정보산업국의 설치가 필요하다며 그 당위성을 수 차례 말했다. 최 장관의 증언. “총무처 장관에게 정보산업국 신설의 필요성을 말했더니 “최 장관, 지금 정부에서는 행정기관 조직을 축소하라고 난린데 어떻게 새로운 기구를 만들겠다는 겁니까”라며 난색을 보였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에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비서실 관계자가 “저는 정보산업에 대해 잘 모릅니다. 장관님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난감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최형섭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면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한 가지 방안을 찾았다. 다름 아닌 행정 전산화였다. 당시 전국 행정기관의 업무 처리는 모두 수작업이어서 통계나 서류 발급 등 단순 업무 처리에 공무원들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했다. 최 장관은 1975년 2월 대통령 연두순시를 앞두고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산실장에게 행정전산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975년 2월 17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과학기술처를 연두 순시하고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 받았다. 최형섭 장관은 “올해는 과학기술 기반 구축과 정보산업 육성에 역점을 두겠다”고 보고했다. 업무보고 후 최 장관은 성기수 박사가 개발한 행정 전산화 프로그램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 주면서 건의했다. “각하, 행정을 기계화하려면 전산화해야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행정전산화를 위한 시범 프로그램입니다. 이 일은 총무처에서 해야 합니다.” 평소 행정업무 전산화에 관심이 많던 박정희 대통령이 즉석에서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한번 추진해 봅시다.”

성기수 박사의 회고. “행정 전산화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은 각별했습니다. 어느 부처를 가리지 않고 연두순시 때마다 행정업무 전산화를 강조했습니다. 저는 1970년 4월 6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열린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30분간 '예산업무 전산화와 정부 행정 전산화'에 관해 보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도 박 대통령 지시에 따라 한 것입니다.”

이튿날인 2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총무처를 연두순시했다. 박 대통령은 심흥선 총무처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계획 보고를 받고 “올해 안에 행정 기계화를 이룩해서 업무 능률을 높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한마디를 추가했다. “심 장관, 이 내용을 잘 모르면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심흥선 장관은 업무보고가 끝나자 곧장 최형섭 장관실을 찾았다. 최형섭 장관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예상대로 일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최 장관의 이어진 증언. “심 장관에게 '과학기술처 소관인 중앙전자계산소를 총무처로 넘겨줄 테니 계산소를 활용해서 행정 전산화를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이 같은 업무를 잘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처에 정보산업국 설치가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심 장관이 내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두말하지 않고 정보산업국 설치에 동의했다.”

중앙전자계산소는 1970년 4월 2일 행정 업무처리 과학화를 위해 설립됐다. 계산소는 과학기술처 장관의 지휘를 받는 산하 기관이었다. 최형섭 장관은 심흥선 장관과 한 약속대로 1976년 6월 12일 전자계산소를 총무처로 이관했다. 총무처는 같은 해 12월 전자계산소 명칭을 정부전자계산소로 변경했다. 이 같은 곡절과 일종의 정책 빅딜 과정을 거쳐 최형섭 장관은 숙원인 정보산업국을 신설했다. 초대 정보산업국장에는 김영욱 박사를 임명했다. 김영욱 국장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테네시대에서 화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교수를 거쳐 정보산업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이후 아주대 산업대학원장과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정보산업국에는 정보산업과, 정보유통과 등 2개 과를 두었다. 정보산업과는 정보산업에 관한 기본정책 수립과 종합조정, 정보산업 진흥을 위한 제도 연구, 전자계산 조직의 국산화와 표준화 지원, 정보산업 단체 육성, 정보산업에 대한 국제협력업무를 담당했다. 정보유통과는 정보유통 정책 수립, 정보처리기술자격 검정 관리, 정보처리 용역 수출지원, 정보처리 비밀 보호 등을 맡았다.

심흥선 장관은 같은 해 6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1976년부터 7개년 계획으로 전국 행정기관에 전자계산 인력을 배치해 중앙에서 읍·면에 이르기까지 전국 행정업무를 컴퓨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행정 쇄신책이었다. 이 계획은 행정전산화와 전자정부 구현의 시발점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정보산업육성법 제정을 야심작으로 추진했다. 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보산업 관련 업무가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체신부, 총무처 등으로 분산돼 있어 법 제정까지는 난항이었다.

정보산업육성법 제정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자 전국경제인엽합회(전경련)가 1978년 11월 6일 정부에 정보산업육성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전경련은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 부처로 분산된 정보화 업무 행정체계를 일원화하고 컴퓨터 활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유한 각종 자료의 공개 폭을 확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경련은 또 1980년대 산업 고도화와 컴퓨터 산업 육성을 위해 고위정책기구를 설립하고, 정보산업을 일관성 있게 육성해야 하며, 정보처리 인력 육성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5월. 과학기술처는 관련 부처와 협의해서 정보산업육성법을 제정하겠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끝내 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당시 과학기술처 관계자의 말. “당시는 정보산업 업무를 총괄하는 부처가 없었습니다. 부처별로 정보산업 업무가 분산돼 있어서 이를 총괄해 정보산업육성법안을 마련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과학기술처에서 소프트웨어산업 육성법을 제정하고자 했지만 이도 부처 간 이견으로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1981년 11월 과학기술처 직제를 개정하고 정보산업국을 정보계획국으로 변경했다. 계획국 아래 종합계획과, 조사과, 정보산업과를 두었다. 종합계획과는 과학기술진흥 기본정책 수립과 장단기 총괄 조정 및 종합과학기술심의회 운영 등, 조사과는 국내외 과학기술 조사와 통계 수립 등, 정보산업과는 정보산업에 대한 기본정책 수립과 조정 및 전자계산조직 표준화 등을 각각 담당했다. 정보계획국은 1983년 11월 정보산업기술국으로 변경했고, 1985년 8월 업무를 기술정책실로 통합했다.

정보산업은 제5공화국 들어와 날개를 달았다. 정부는 정보산업 육성을 핵심 정책으로 적극 추진했다.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주도로 정보산업육성방안을 마련, 1983년 3월 14일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같은 해 4월 정부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위원장인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구성하고 상공부, 과학기술처, 총무처 등 각 부처의 컴퓨터 도입 업무를 종합 심의했다. 제5공화국은 정보산업 육성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