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만 쓴다는 ‘딥엘’ 번역기, 직접 사용해 보니

출처:DeepL
출처:DeepL

며칠 전 국내에서도 챗GPT로 만든 도서가 나왔습니다. 스노우폭스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낸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 덕분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목을 끌지 못했던 인공지능 기술이 새삼 다시 주목받게 됐어요. 내용 작성과 교정·교열은 챗GPT가 맡았지만, 그 외 작업은 다른 인공지능이 맡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이미지는 셔터스톡의 생성 인공지능 ‘셔터스톡AI’가 그렸고, 번역은 네이버 인공지능 번역기 파파고가 맡았다고 합니다. 챗GPT가 생성한 영문을 파파고가 우리말로 옮겨 적은 겁니다. 새삼 신기합니다. 완성도는 둘째치고,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온 번역기 수준이 어느새 책 출판에 사용될 정도로 발전했으니까요.

그러던 중 꽤 흥미로워 보이는 번역기가 등장했습니다. 딥엘(DeepL)이라는 서비스입니다. 찾아보니, 국내에선 생소한 번역기지만 해외에선 꽤 유명한가 봅니다. 전 세계 사용자 수만 10억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최근 한국어 서비스도 시작했는데, 반응도 괜찮아 보입니다.

딥엘은 생소한데...어디서 온 번역기지?

아는 사람만 쓴다는 ‘딥엘’ 번역기, 직접 사용해 보니

딥엘은 독일 쾰른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 업체 딥엘사의 번역 서비스입니다. 서비스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됐어요. 지난 2017년 처음 공개됐으니까요. 그러나 국내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아 이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죠. 지난달 말 딥엘이 드디어 한국어 번역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딥엘은 구글 번역보다 완성도 높은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알려졌어요. 딥엘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기계 번역기’를 자처할 정도죠. 자체 전문가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경쟁사 번역기 대비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데요. 딥엘에 따르면 자사 번역 서비스가 타사 번역기 대비 평균 3배 이상 정확하다고 합니다.

영어-독일어 번역 정확도 6배, 영어-중국어 정확도 5배, 영어-일본어 정확도 6배 / 출처: DeepL
영어-독일어 번역 정확도 6배, 영어-중국어 정확도 5배, 영어-일본어 정확도 6배 / 출처: DeepL

딥엘은 여타 번역기처럼 인공신경망 기반 딥러닝을 활용했습니다. 대신 인공신경망 종류가 달라요. 구글 번역이나 파파고는 순환 신경망(RNN), 딥엘은 합성곱 신경망(CNN) 방식이라고 합니다. CNN은 주로 이미지 처리에 사용되는데요. 딥엘은 이를 개선해 텍스트 번역에 사용한다고 해요.

딥엘 측에 따르면 번역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 더 높은 품질의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환경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또 딥엘이 직접 번역한 결과물과 데이터 세트의 번역을 반복 비교하면서, 번역 완성도를 끌어올렸다고 해요.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하죠. 기술적인 내용을 뒤로 하고, 딥엘의 번역 수준을 살펴봤습니다.

외신 번역 시켜보니...기대 이상이다
딥엘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영문으로 작성된 해외 기사를 가져왔습니다. 첫 번째는 로이터 통신의 기사입니다. 챗GPT가 만든 책이 뜨고 있다는 내용인데요. 딥엘이 기사의 리드, 즉 시작 부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확인해봤습니다. 결과부터 설명하면, 기대 이상입니다. 영문 기사를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딥엘 번역
딥엘 번역

-원문 : “Until recently, Brett Schickler never imagined he could be a published author, though he had dreamed about it. But after learning about the ChatGPT artificial intelligence program, Schickler figured an opportunity had landed in his lap.”

-딥엘 : “최근까지만 해도 브렛 쉬클러는 꿈은 꾸었지만 출판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ChatGPT 인공 지능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된 후 시클러는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외신을 읽다 보면 이해는 되는데, 우리말로 풀어쓰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영어권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인데 한국어로 고치면 어색할 때가 있죠. 딥엘은 그런 부분 없이 완성도 높은 번역 수준을 보여줬습니다. 번역된 부분을 그냥 읽으면 처음부터 우리말로 작성한 것 같습니다.

다른 번역기는 똑같은 내용을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구글 번역
구글 번역

-구글 번역 : 최근까지 Brett Schickler는 자신이 출판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ChatGPT 인공 지능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된 후 Schickler는 자신의 무릎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파고 : 최근까지 브렛 시클러는 자신이 출판된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ChatGPT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된 후, 시클러는 기회가 자신의 무릎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인지 짐작은 가는데, 매끄럽지 않습니다. 구글 번역은 사람의 이름을 영문으로 그대로 표기했고, ‘자신의 무릎에 기회가 왔다’는 모호한 표현을 그대로 직역했습니다. 파파고는 동일한 문장을 ‘기회가 자신의 무릎에 떨어졌다’ 번역했습니다. 반면 딥엘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자연스레 번역했죠.

짧은 문장은 대동소이한 것 같은데
짧은 문장으로 다시 확인해봤습니다. 문단 단위 번역 때보다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파파고 번역이 조금 부족해 보이긴 한데,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딥엘 번역
딥엘 번역

-원문 : "The idea of writing a book finally seemed possible," said Schickler, a salesman in Rochester, New York. "I thought 'I can do this.'“

-딥엘 : 뉴욕 로체스터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는 쉬클러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이 마침내 실현 가능해 보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글 번역 : 뉴욕주 로체스터의 세일즈맨 쉬클러는 "책을 쓴다는 생각이 마침내 가능해 보였다"고 말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파파고 : "책을 쓴다는 생각은 마침내 가능해 보였습니다," 라고 뉴욕 로체스터의 판매원 시클러가 말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민음사
출처:민음사

번역에 따라 문맥의 흐름이나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소설이나 영화 번역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합니다. 소설 <이방인>도 번역 논쟁을 겪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방인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쓴 스테디셀러 작품인데요. 첫 문장이 유명합니다. 국내 번역본에서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라고 표현했죠.

딥엘은 이를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딥엘과 구글 번역의 번역 수준은 비슷해 보이는데요. 딥엘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파파고 번역은 높임말과 낮춤말을 혼용하고 있어 조금 아쉽습니다.

-원문(불어)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딥엘 :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아니면 어제 돌아가셨을지도 모르죠.

-구글 번역 : 오늘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니면 어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파파고 :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 아니면 어제일 수도 있겠죠. 잘 모르겠어요.


관용적 표현은 아쉽다

딥엘 번역
딥엘 번역

오히려 관용적 표현에선 파파고가 두 서비스를 앞섰습니다. ‘A piece of cake’, 우리말로 손쉬운 일을 뜻하죠. 파파고는 이를 정확히 ‘식은 죽 먹기’라고 번역했습니다. 반면 다른 두 번역기는 케이크 한 조각이라고 그대로 직역했고요. ‘Walls have ears’라는 표현 역시 파파고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어요.

파파고 번역
파파고 번역

우리말 표현 중엔 ‘입이 짧다’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거나, 조금만 먹는다는 의미를 가졌죠. 파파고는 이를 Be a picky eater(식성이 까다롭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표현에 담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 겁니다. 반면 나머지 두 번역기는 또다시 Short mouth(짧은 입)라고 직역했습니다.

한국에선 유료 기능 사용하기 어렵다
딥엘은 무료 버전과 유료 버전인 딥엘 프로(DeepL Pro)로 나뉩니다. 유료 버전은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합니다. 먼저 번역 글자 수 제한이 사라집니다. 딥엘은 문서 파일을 업로드한 뒤 번역할 수 있는데요. 유료 버전을 사용하면 업로드 최대 용량이 늘어납니다. 이외 전체 웹페이지 번역, 번역한 데이터 삭제 등 부가 기능을 지원합니다. 번역기는 번역한 내용을 수집해서 품질 개선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안에 신경쓴다면 괜찮아 보이는 기능입니다.

출처:DeepL
출처:DeepL

하지만 아직 국내에선 유료 버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지원 국가에 한국이 없어요. 특히 전체 웹페이지 번역을 사용할 수 없는 게 가장 아쉽습니다. 궁금한 내용을 일일이 복사해서 번역을 돌리는 일은 꽤 번거롭거든요. 반면 구글 번역과 파파고는 각각 자사 웹브라우저 크롬과 웨일에서 동일한 기능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만 쓴다는 ‘딥엘’ 번역기, 직접 사용해 보니

제한적으로 웹사이트 안에서 바로 딥엘 번역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크롬 확장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를 설치하면 특정 부위만 선택해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번역하고자 하는 부위를 드래그해서 선택하면, 마우스 커서 옆에 딥엘 아이콘이 떠요. 이걸 클릭하면 번역창이 뜨면서 알아서 번역해 줍니다.

구글 번역에 비하면 아직 지원하는 언어 수도 모자란 편입니다. 구글 번역은 현재 134개 언어를 지원하는 반면, 딥엘은 29개 언어를 번역할 수 있습니다. 파파고는 이보다 적은데, 15개 언어만 번역 가능합니다.

딥엘은 호흡이 긴 문장이나 문단 단위 번역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일부 관용적 표현을 잘 번역하지 못하고 몇몇 기능은 유료 서비스로 사용이 제한되긴 하지만, 다른 번역기에 비해 떨어진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언젠가 보완되지 않을까요.

테크플러스 윤정환 기자 (tech-pl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