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는 규제 틀에 갇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CO 금지 이후 유망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규제를 피하려는 우회 전략이 업계의 기본 기조가 돼버렸다. 이대로라면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가상자산 시장의 패러다임을 다시 설계해야 할 때다.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현재 불균형한 성장 구조를 보이고 있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관련 사업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성장의 중심은 소수 대형 거래소에 집중돼 있다. 특히, 특금법상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를 확보한 일부 거래소만 원화 마켓을 운영할 수 있어 신규 사업자 진입이 사실상 차단된 상태다. 또 가상자산 거래 법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 금융 규제와 산업 육성 정책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해외 법인을 설립해 사업을 운영하거나, 국내에서 론칭하기 어려운 비즈니스 모델을 외국에서 전개하는 실정이다.
해외 주요국들은 가상자산을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며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재등장과 함께 '디지털 금융 기술 리더십 강화' 행정명령을 발효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180일 내 규제 가이드라인과 입법 제안을 마련하겠다고 예고하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글로벌 확산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디지털 금융 패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국내 가상자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법적 틀을 정비하고 규제를 개혁하는 것이 필수다. 기업과 법인의 가상자산 보유 및 거래를 합법화해 시장 참여를 유도하고, 자본 유출을 막아야 한다. 또 토큰증권 등 디지털 자산 금융상품의 성장을 위해 자본시장법과 전자증권법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하고, 외국환거래법 개정을 통해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과의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규제의 균형도 중요하다. 거래소뿐만 아니라 다양한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가 공정하게 경쟁하며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특히, 가상자산 결제·송금, 디지털 자산 증권화, CBDC 연계 등 금융 인프라 혁신과 DeFi·NFT 같은 신기술 서비스가 국내에서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명확한 규제 기준이 필요하다.
규제 체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정책 조율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미국은 대통령 직속으로 가상자산 및 인공지능(AI) 정책을 총괄하는 전담 조직을 두고, 전문가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는 신속하고 전문적인 정책 대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이를 위해 우리도 독립적 규제기관이나 조율 기구의 역할 강화를 적극적으로 고려해볼만 하다.
국내 시장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가상자산위원회에서 2단계 가상자산 입법이 논의됐으며 스테이블코인 규율과 가상자산사업자의 영업행위 규제 등이 주요 과제로 다뤄졌다. 또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을 위한 국회 포럼이 열려 법적 공백 해소 방안을 논의했다. 이는 긍정적인 신호다. 다만 규제 중심의 접근에 머물러선 안 된다. 산업 성장과 신뢰 구축을 고려하는 균형 잡힌 법제화를 통해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가상자산 시장의 새 판을 짤 적기다.
송민택 공학박사 pascal@apthefin.com